서울 을지로에서 명동성당 쪽으로 넘어가는 길에 있는 중앙시네마(사진)가 지난 5월31일 개관 76년만에 문을 닫았다. 옛날 이름이 중앙극장인 이 영화관은 내가 고등학생 때부터 기자생활을 할 때까지 자주 찾던 곳이다. 난 어렸을 때 영화관에서 살다시피 했는데 중고교생 때는 돈이 없으면 사전을 팔아 극장엘 갔다. 극장은 나의 보금자리요 안식처이자 내 정신의 배양소 구실을 했는데 중앙극장도 그 중의 하나다.
중앙극장에서 본 영화들 중 언뜻 생각나는 것이 내가 고교생 때 본 존 웨인 주연의 웨스턴 ‘리오 브라보’다. 올해로 개봉 반세기를 맞는 ‘사이코’와 마지막 장면에서 눈물을 흘렸던 ‘로마의 휴일’ 그리고 폴 뉴만이 영화 내내 위스키와 맥주 등 각종 주류를 마셔대던 현대판 웨스턴 ‘허드’ 등도 다 여기서 본 것으로 기억한다. 또 레이건의 마지막 영화 ‘킬러스’도 여기서 봤다. 내가 중앙극장에서 마지막으로 본 영화는 ‘디어 헌터’로 나는 이 영화를 본 뒤 얼마 안 돼 할리웃이 있는 LA로 왔다.
중앙극장 폐관소식을 읽고 역시 영화를 좋아하는 여동생에게 전화를 걸어 “너는 거기서 무슨 영화를 봤느냐”고 물었다. 동생은 “오빠가 내가 과외공부를 가르쳐 월급 5,000원을 탄 날을 기다렸다가 ‘십계’를 보러 가자고 해 거금 3,000원을 썼다”며 깔깔대고 웃었다.
우리가 중고등학생일 때는 학교에서 단체로 몇 달에 한 번쯤 영화구경을 시켜줬는데 이 외에 혼자 극장을 갔다가 단속원에게 걸리면 정학을 받았다. 내가 고1 때 겁 없이 교복을 입고 혼자 앨란 래드가 나온 웨스턴 ‘대혈산’을 보러갔다가 단속원에게 걸려 2주 정학을 받은 극장이 경남극장이다.
서부영화 봤다고 정학을 주는 제도가 가소로웠는데 그 땐 정학을 받으면 집에서 속죄하면서 반성문을 썼다. 그래서 나는 2주 동안 반성문을 쓰면서 거의 매일 극장엘 갔다.
조선호텔 앞에 있던 경남극장은 내가 고등학생 때 가장 자주 간 극장으로 또 다른 잊지 못할 에피소드가 있다. 어느 날 프랭크 시나트라와 토니 커티스 및 나탈리 우드가 나오는 전쟁영화 ‘킹스 고 포스’를 보러 갔다가 캄캄한 데서 자리에 앉았다. 그런데 아뿔싸 내 옆에 앉은 사람이 부인과 함께 구경 온 중2 때 담임선생님 아닌가. 선생님의 “박흥진, 집에 가서 공부해”라는 경고에 나는 자리를 떴지만 퇴장 안 하고 뒤에서 숨어서 영화를 다 보고나서야 도망쳐 나왔다.
내가 초중학생이었을 때는 서대문의 동양극장과 용산의 성남극장 그리고 명동극장엘 자주 갔다. 동양극장에서는 나의 올타임 페이보릿인 ‘지상에서 영원으로’와 ‘7인의 신부’를 성남극장에서는 윌리엄 홀든이 오스카 주연상을 탄 ‘제17 포로수용소’와 숏커트를 한 잉그릿 버그만의 하얗고 가지런한 치열이 인상적이던 ‘누구를 위하여 종은 울리나’를 봤다.
명동극장에서는 토니 커티스와 잭 레몬과 몬로가 나온 ‘뜨거운 것이 좋아’를 봤는데 입추의 여지가 없는 극장에서 꼬마가 어른들 틈에 서서 보면서 너무나 웃어 허리가 아팠던 기억이 난다. 그리고 깡패 임화수의 소유였던 종로 5가의 평화극장에서는 게리 쿠퍼가 나온 ‘우정 있는 설복’을 봤다.
을지로에 있던 국도극장은 내가 어렸을 때 어머니와 함께 ‘쿼 봐디스’를 본 곳이다. 나의 돌아가신 어머니는 자그마한 분이어서 그런지 삼손으로 나온 근육질의 빅터 마추어와 눈과 입을 비롯해 모든 것이 큼직한 소피아 로렌을 좋아하셨다.
광화문에 있던 국제극장에서는 마리오 란자가 나온 ‘세레나데’를 봤고 종로 3가에 있는 서울극장에서는 고교 입시에 붙었다고 어머니가 돈을 줘 폴 뉴만이 나온 권투영화 ‘상처뿐인 영광’을 봤으며 을지극장에서는 찰턴 헤스턴이 교향악단의 지휘자로 나와 바그너의 ‘탄호이저’ 서곡을 어색하게 지휘한 ‘카운터포인트’를 봤다.
그리고 광화문에 있던 아카데미극장에서는 히치콕의 ‘환상’을 중1 때 단체로 ‘셰인’을 본 단성사 건너편의 피카딜리 극장에서는 ‘007 위기일발’을 치과대 출신의 배우 신영균의 소유였던 명보극장에서는 존 웨인이 파란 눈의 징기스칸으로 나온 ‘정복자’와 지금의 아내와 연애할 때 ‘대부’ 2편을 봤다.
또 종로에 있던 우미관에서는 앨란 래드가 나온 털이영화 ‘배드랜더스’를 서대문극장에서는 고다르의 ‘네 멋대로 해라’를 그리고 명보극장 건너편의 수도극장에서는 스티브 매퀸이 나온 ‘산 파블로’를 각기 봤다.
중앙극장의 폐관은 멀티플렉스의 힘에 밀려 단일극장들이 고사하는 요즘 시류 탓이다. 이런 현상은 LA도 마찬가지다. 웨스트우드의 단일극장들이 속속 폐관하고 있는 것이 그 예다. 중앙극장의 폐관이 마치 내 어린 시절 추억의 페이지를 닫아버리는 것 같아 마음 한구석이 허전해 진다.
박흥진 / 편집위원
hjpark@koreatime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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