흑백 화면처럼 단조롭던 삶의 풍경이 한 순간에 총천연색으로 바뀔 때가 있다. 설렘, 흥분, 혹은 열정 같은 감동이 한줄기 바람처럼 우리 삶의 지평에 불어드는 때이다. 무료하게 가라앉아 있던 시간들은 반짝이며 살아나고 삶은 생동감이 넘친다.
한인사회가 다시한번 지독한 연애 같은 감동으로 들떴다. 연초의 각오도 기대도 시들해진 한해의 한 가운데, 납덩이처럼 가라앉아 좀처럼 뜨지 않는 경기 … 그날이 그날 같던 우리의 일상에 ‘자블라니’가 날아들었다.
그 시간에 누가 일어날까 싶은 새벽에 스테이플센터로, 잔디광장으로, 교회로, 식당으로 붉은 무리들이 모여들고, 튀어 오르는 축구공의 향방에 따라 가슴 졸이고 환호하고 탄식하며 우리는 6월을 보내고 있다. 흑백 화면 같던 우리의 시간 중에 갑자기 설렘과 흥분, 신바람이 찾아들었다.
4년에 한번씩 우리를 집단 열병으로 몰아넣는 축제, 월드컵으로 한인사회가 모처럼 활기를 띄고 있다. 만나는 사람마다 ‘축구’로 인사를 나누고 ‘축구’로 웃고, ‘축구’에 맞춰 일정을 조절한다. 경기도 경기지만 그 못지않게 우리를 활기차게 만드는 것은 응원.
‘붉은 악마’의 빨간색 복장과 ‘대~한 민국!’ 응원은 2002년 한일월드컵 이후 한민족의 확실한 문화코드로 자리 잡았다. 10대였던 아이들은 이제 20대가 되어 응원을 주도하고, 한반도는 서울 광장부터 해운대 해변까지 더 새롭고 더 창의적인 응원 물결로 가히 하해를 이룬다.
우리는 왜 이렇게 응원에 열심일까. 한국대표팀이 8강 아니라 우승을 한다 해도 현실적으로 아무 상관이 없는 우리가 월드컵에 이렇게 열광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선수들을 ‘나’와 동일시하는 연상작용의 심리 때문이라고 한다. 내가 소속된 민족, 국가, 단체 - 우리가 ‘우리’ 라고 부르는 집단을 대표하는 사람들은 ‘우리’의 구성원이고 그 ‘우리’ 속에는 ‘나’도 포함되는 이치이다. 그래서 그들이 잘하면 내가 잘한 듯 우쭐해지고 그들이 못하면 내가 못한 듯 풀이 죽는 것이다. 거기에 한국사람 특유의 신명이 더해지니 응원이 곧 축제가 되는 특이한 현상이 만들어졌다.
그렇다면 응원은 우리만의 축제일까. 선수들에게는 어떤 효과가 있을까. 운동선수들의 경험을 들어보면 경기장에서 관중들의 응원은 대단한 힘이 된다. 경기가 잘 풀리지 않아 힘들고 지쳐 있을 때 응원소리를 들리면 선수들은 기가 살아난다고 한다. 한 정신과 의사의 설명이다.
“경기장에서 선수들은 전쟁터에 나간 것과 같은 상황이지요. 위기의식에 사로잡히게 됩니다. 그럴 때면 이성보다 원초적 감정에 이끌리게 되지요. 그래서 누군가 자기를 응원해주면 뇌에서 도파민, 엔돌핀 같은 호르몬들이 분비되면서 저도 모르게 힘이 솟구치게 됩니다"
경기장이 아닌 지구 반대편에 있는 우리의 응원은 어떨까.
2주전 LA타임스에는 다저스 구단에 관한 흥미로운 이야기가 실렸다. 구단주가 다저스의 승리를 위해 러시아 출신의 한 물리학자를 기용했었다는 내용이다. 2004년 시즌부터 5년간 블라디미르 쉬펀트라는 물리학자가 한 일은 다저스 선수들을 위해 긍정적 에너지를 보내주는 것이었다. 그가 경기장에 직접 간 것은 단 한번. 그 외에는 모두 보스턴 그의 집에서 명상하듯, 기도하듯 깊이 몰입하며 수천마일 밖의 선수들에게 에너지를 불어넣어 주었다고 한다. 구단 측은 그 효과를 이렇게 설명한다.
“실력 없는 팀이 갑자기 실력 있는 팀으로 바뀔 수는 없지요. 하지만 그의 에너지가 승률을 10~15% 정도 높이는 것으로 봅니다. 선수들이 실력을 최대한 발휘할 수 있도록 돕는 것이지요"
축구는 어느 뛰어난 한 선수의 기량으로 판가름 나는 운동이 아니다. 어디로 튈지 모르는 둥근 공, 22명 선수들이 부딪치고 뒤엉키며 만들어내는 무한한 변수를 아우르며 승패가 결정된다. 그래서 종종 예측 못하던 결과들이 나오는 데 그 불분명한 영역에 정신적 에너지가 끼어들어 힘을 발휘하는 것이 아닐까. 세계 곳곳 한인들의 붉은 응원의 물결, 그 긍정적 에너지에 힘입어 한국 팀이 여기까지 온 것인지도 모른다.
인생이라는 경기장에서도 응원은 필요하다. 그가 이기면 내가 이긴 듯 기쁘고, 내가 이기면 자신이 이긴 듯 기뻐해주는 사람들이 있어서 우리는 힘을 얻고 살아간다. 우리가 응원을 하는 이유이다.
권정희 / 논설위원
junghkwon@koreatime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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