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월 중순의 맨해턴은 후덥지근하고 눅눅했다. 몸 안으로 습기가 박테리아처럼 파고들면서 피곤과 함께 나태가 온 몸을 물 먹은 습자지처럼 적셨다.
지난 19일 오늘 개봉되는 스파이 액션 코미디 ‘나잇 앤 데이’(영화평 ‘위크엔드’판)에 나오는 탐 크루즈와의 인터뷰 차 뉴욕에 들렀다. 도착 당일 저녁에 뉴욕 필의 연주를 듣기 위해 숙소에서 걸어서 15분 거리에 있는 링컨센터를 찾아 갔다.
나는 수년 전 오렌지카운티 공연센터서 뉴욕 필의 연주를 당시 필의 상임지휘자인 로린 마젤의 지휘로 들은 적이 있다. 그 뒤로 뉴욕에 들를 때마다 꼭 한번 필의 연주를 이 교향악단의 본부인 링컨센터 내 에이버리 피셔홀(사진)에서 듣는다고 벼르다가 이번에 실천했다.
피셔홀의 연주장에 들어가기 전 경찰의 표 검사를 받았는데 경찰은 연주장 밖 로비(로댕이 제작한 뉴욕 필의 옛 상임지휘자 구스타프 말러의 흉상이 있다)에서도 경비를 서고 있었다. 뉴욕이 테러와 상주하는 도시라는 것을 새삼 깨달았다.
2009~10년 시즌부터 뉴욕 필의 상임지휘자로 활동하는 앨란 길버트(43)는 필 사상 최초의 뉴요커 지휘자로 그의 일본계 어머니 요코 타케미는 현재 아들 밑에서 바이얼리니스트로 연주하고 있다.
첫 곡은 바그너가 자기 아내 코지마(리스트의 딸)의 33세 생일선물로 작곡한 ‘지크프리트의 목가’. 말러가 자기 아내 알마에게 보낸 연서인 제5번 교향곡의 아다지에토처럼 곱고 서정적인데 윤기가 나는 연주였다. 그러나 길버트의 지휘는 너무 감정을 억제해 음악의 내적 감정을 충분히 이끌어내지 못해 가슴 깊이까지 음악의 감정이 전달돼 오질 않았다.
길버트의 이런 폐쇄적 지휘는 이어 연주된 모차르트의 교향곡 제25번 연주 때도 마찬가지였다. 이 곡은 모차르트의 교향곡 제40번과 함께 완전한 형태를 한 교향곡으로서는 단 둘의 단조인 작품으로 영화 ‘아마데우스’에서 쓰여져 대중에게 잘 알려진 곡이다.
이 곡은 연주시간이 비록 20분짜리인 ‘소품’이긴 하지만 극적이요 어둡고 에너지가 들끓는 격정적인 작품이다. 그런데 길버트의 서름서름한 지휘로 인해 작품의 폭풍적인 내성에 족쇄가 채워진 듯해 시원치가 못했다.
휴게시간 후 연주된 첫 곡은 현존하는 오스트리아 작곡가 H.K. 그루버의 2악장짜리 트럼핏 협주곡 ‘공중에서’(Aerial)로 처음 듣는 곡이다. 그루버는 지구의 풍경을 공중에서 내려다보는 관점으로 이 곡을 만들었다고 한다.
재즈풍이 강한 음악으로 장식음이 화려했는데 1악장에서는 일본 전통음악의 터치도 느껴졌다. 현대음악이란 처음 들을 때 쉽게 소화하기는 힘들지만 이 음악은(연주시간 25분) 시간이 흐르면서 점점 친근감을 느끼게 된다.
특히 스웨덴 태생의 트럼피터 하칸 하덴버거의 정열적인 연주가 화끈하게 어필해 왔다. 그는 트럼핏과 피콜로 트럼핏 그리고 카우스 혼 등 세 악기를 번갈아가며 사용하면서 연주했는데 듣기에 연주하기가 상당히 힘든 곡을 힘 있고 유연하게 표현했다. 특히 이국적인 댄스곡 풍의 클라이맥스가 듣는 사람을 흥분시킬 만큼 화려하고 역동적이었다.
도무지 신통치가 않게 여겨지던 길버트의 지휘는 마지막 곡인 바그너의 오페라 ‘트리스탄과 이졸데’의 전주곡과 이 오페라의 마지막 러브신 ‘리베스토트’(사랑의 죽음)를 연주하면서 그 모습이 달라졌다.
제목처럼 목가적인 ‘지크프리트의 목가’에 이어 연주된 ‘리베스토트’는 내가 가장 좋아하는 클래시컬 러브송이다. 아름답고 관능적이며 비장하고 로맨틱한데 죽음에 의해서 사랑을 소진시키는 두 연인의 동경과 사무침이 밀물과 썰물처럼 들락날락하는 현들의 무성한 소리를 듣자니 가슴 속에서 눈물이 터져 나온다.
길버트는 이 곡에서 비로소 음악의 본질과 하나가 되어 그것의 감정적 힘을 충전시키고 보폭을 잘 따라갔는데 차분하면서도 극적인 지휘였다. 그제야 답답하던 속이 확 풀렸다.
음악회가 끝나고 호텔로 돌아와 늦은 저녁을 먹으려고 식당엘 들어서니 할리웃 외신기자협회(HFPA) 독일인 동료회원으로 재즈광인 엘마가 보였다. 엘마는 내게 오늘 밤 12시 반에 로우어 맨해턴의 빌리지에 있는 유명한 재즈클럽 ‘블루 노트’에서 세계적인 드러머 스베티가 연주하는 콘서트에 가겠느냐고 묻는다. 그렇지 않아도 ‘블루 노트’는 꼭 한번 가보고 싶었던 곳이어서 몸이 좀 고단했지만 내친 김에 택시를 타고 맨해턴 아래로 내려갔다.
재즈 드럼의 ‘진정한 혁신자’로 불리는 슬로베니아 태생의 스베티는 색스와 베이스와 피아노로 구성된 4인조 밴드를 리드하면서 정확성이 분명하고 강력한 연주를 했다. 현대적이지만 재즈의 고전적 정열을 지닌 박진한 연주였다. 새벽 2시가 넘어서야 호텔에 돌아 왔다.
박흥진 / 편집위원
hjpark@koreatime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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