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마’했다가 큰 화를 당하는 경우가 있다. 최근 ‘설마’에 당한 천안함 참사로 고국이 내홍을 치르는 것을 울적한 마음으로 지켜보다 군복무 시절 ‘단 한 번, 단 하나의 목적’을 강조하던 김중위가 문득 생각났다. 군대 얘기는 되도록 삼가는 편이지만 월드컵 축구 열기에 천안함 이슈가 녹아버리기 전 김중위 얘기를 꼭 꺼내고 싶다.
한탄강 기슭 언덕 위에 자리 잡은 사단 의무중대 입구에는 개울이 흘렀다. 폭 10여미터에 물이 정강이의 반쯤 차오르는 이 개울에는 장병들이 돌로 쌓아 만든 돌다리가 놓여 있었다. 장병들과 군 차량들이 유일한 통로인 이 돌다리를 통해 부대를 드나들었다.
장마전선과 함께 나는 이등병 계급장을 달고 이 부대에 전입되었다. 전입 이튿날부터 나는 장마에 대비한 각종 노역에 불려 다니며 초주검이 되었다. 나는 하루 빨리 장마 비가 쏟아지기만을 하늘을 우러러 빌었다. 비가 오면 야외 중노동은 뚝 그칠 것이라고 굳게 믿었기 때문이었다.
전입 닷새째에 잔뜩 찌푸렸던 먹구름이 드디어 비를 뿌려대기 시작했다. 나는 속으로 하나님 만세를 불렀다. 막사를 마구 두드려대는 빗방울 소리가 마치 ‘신세계 교향곡’ 같았다. 장병들은 내무반 안에서 하늘이 내린 휴식을 즐기고 있었다. 휴식이 깨진 것은 드세던 빗발이 약해졌다고 느낄 즈음이었다.
“우의 걸치고 중대 전원 연병장에 집합!”
부슬부슬 비가 내리는 연병장 한가운데 미군용 비옷인 판초를 둘러쓰고 중대 부관 김중위가 떡 버티고 서있었다. 장병들이 도열을 마치자 김중위가 입을 열었다.
“지금부터 부대 앞개울 돌다리 보수작업을 시작한다. 휴식을 방해해서 불만 있나!”
“불만 없습니다!” 이구동성 외쳐댔지만 장병들의 속은 불만으로 부글부글 끓고 있었다. 장병들은 어깨를 축 늘어뜨리고 패잔병처럼 말없이 김중위의 뒤를 따라 나섰다.
개울물은 불어 무릎까지 차올랐고 센 물살에 돌다리도 군데군데 쓸려나갔다. 장병들은 2인 일조가 되어 물살을 가르며 바위를 들어 올려 돌다리를 보수했다. 허리가 휘는 돌다리 보수작업은 장마철 내내 계속되었다. 빗속에서 세 차례나 작업에 동원된 날은 밤새 끙끙 몸살을 앓았다. 장마철에는 휴식을 좀 취할 수 있으리라는 졸병의 장밋빛 꿈은 장마에 휩쓸려 물 건너가 버리고 말았다.
돌다리 노역 닷새째 되던 날, 취침 점호시간에 주번사관이었던 김중위가 나타났다. 말수가 적은 그는 점호를 마치고 짤막한 훈시를 하겠다며 입을 열었다.
“돌다리 보수작업에 수고들 많았다. 할 일이 없어 시간이나 때우자고 시키는 작업이 결코 아니다. 군인은 적과의 전투라는 단 하나의 목적을 위해 존재한다.
적의 공격이 예측할 수 없는 미래에 100만분의1 확률로 발생한다 할지라도 항상 임전태세를 갖추고 대비하는 것이 군인의 사명이다. 군인 사전에는 ‘설마’가 없다. 돌다리도 전투에 대비해 언제나 이상이 없도록 유지해야 한다. 제군들! 말짱 헛수고를 하는 것 같아 억울한가? 제대 후에도 단 하나, 단 한 번의 목적을 위해 늘 설마를 경계하기 바란다. 장마가 그칠 때가 있겠지”
벌써 40여년의 세월이 흘렀다. ‘장마가 그칠 때가 있겠지’란 말이 ‘한반도에 평화가 올 때가 있겠지’란 의미로 들렸던 기억이 지금도 생생하다.
이제는 추억이 되어버린 장마철 고행은 나의 인생에 고귀한 좌우명 하나를 선물로 안겨주었다. 살다보니 인생은 ‘단 하나, 단 한 번의 목적’을 위해 크고 작은 수고를 지속적으로 감내하지 않으면 안 되는 것이라는 사실을 깨닫게 된다. 국보 1호 숭례문 화재도 목조건물은 불에 탄다는 상식만 명심하고 ‘단 하나의 목적’인 ‘화재 예방’을 위해 철저히 경비했더라면 발생하지 않았을 어처구니없는 인재였다.
’설마’는 ‘단 하나, 단 한 번의 목적’을 깨기 위해 은밀히 겨냥된 수중어뢰 같은 존재이다. 광기 있는 적과 대치하려면 대화도 필요하지만 통일의 그 날까지 적에게 당하지 않는 게 최선이다. 진정한 고수는 당하지 않는다. 당하지 않고 사는 게 어디 그리 쉬운 일일까 마는…. “당할 때를 알지 못하나니, 그러므로 항상 깨어 있으라.”
황시엽 / W.A. 고무 실험실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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