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인 중에 매너가 좋기로 유명한 남성이 있다. 그의 아내는 여왕 같은 대접을 받는다. 자동차든 건물이든 문 앞에 서기가 무섭게 남편이 문을 열어주고, 식사 중 음료수건 냅킨이건 필요하다 싶으면 어느새 남편이 챙겨준다. 밖에서 보기에 그보다 완벽한 남편은 없다. 그런데 그 이면이 있다는 걸 어느 날 부인이 털어놓았다.
“우리 남편은 아무리 심하게 부부싸움을 하다가도 ‘딩동’하고 누가 초인종을 누르면 순식간에 표정이 바뀌어요. 무슨 일이 있었나 싶게 온화한 표정으로 반갑게 손님을 맞지요"
소위 KS 마크, 대외 이미지를 중시하는 엘리트들의 특성이라며 그 부인은 웃었다.
대외적 이미지가 중요한 직업, 엘리트 중의 엘리트인 정치인들은 어떨까? 그림같이 완벽한 이미지 뒤에 좀 다른 현실이 있었던 건 아닐까 하는 의문이 이번 주 제기되었다. 알 고어 전 부통령 부부의 별거 소식의 여파이다.
1970년 결혼한 후 40년을 같이 살아온 고어 부부가 별거에 합의했다. 1965년 고등학교 교정에서 만나 풋사랑에 빠진 때부터 시작하면 45년을 같이 지낸 사이다. 10대에 만나 60대로 접어드는 동안 부부는 고어의 정치적 역정에 따라 ‘비가 오나 눈이 오나’ 함께 했고, 사적으로는 1남3녀를 잘 키워 독립시켰다.
말 많고 탈 많은 워싱턴 정가에서 고어 부부는 대표적 잉꼬부부였다. 특히 부통령이던 90년대에는 섹스스캔들로 바람 잘 날 없던 클린턴 전 대통령 부부와 좋은 대조를 이루었다. 미국에서 결혼식장으로 걸어 들어가는 커플의 50~60%가 이혼하는 이 시대에 고어 부부는 ‘천연기념물’로 꼽혔다. 결혼이라는 전통을 마지막까지 사수할 부부로 기대되었다.
그런 ‘모범 부부’가 ‘많은 생각과 의논 끝에’ 각자 따로 살기로 합의했다는 발표가 나오자 첫 반응은 ‘충격’이었다. 인터넷이 시끌시끌했다. 그 다음은 ‘슬픔’. “우리 부모가 이혼한 것처럼 슬프다"고 젊은이들이 댓글을 줄줄이 달았다. 그리고는 그 부부를 잘 알던 사람들로부터 슬금슬금 이야기가 새어 나왔다. 외부 이미지처럼 그렇게 알콩달콩하기만 한 사이는 아니었다는 암시가 담긴 내용들이다.
우선 지적되는 것은 부부의 정반대 성향이다. 알 고어는 상원의원이었던 아버지가 대통령 감으로 기른 엘리트 중의 엘리트였다. 정치적 야심을 안고 일에만 몰두하는 진지한 타입이었다. 반면 부유한 사업가의 딸이었던 티퍼 고어는 인생을 즐겁고 재미있게 살고 싶은 외향적 타입이었다. 정치가의 아내로서 내조에 최선을 다하기는 했지만 그것이 티퍼 자신이 원하던 삶은 아니었을 것이라는 추측이다. 티퍼가 한때 심각한 우울증에 시달렸고, 사진에 깊이 빠져 사는 것은 이런 맥락에서 이해가 된다.
2000년 대선 결과가 부부에게 치명타가 되었으리라는 추측도 나온다. 선거에서 다 이기고도 백악관을 부시에게 넘겨야 했던 고어는 깊은 좌절에 빠졌고 그 충격이 부부사이도 금가게 했으리라는 것이다.
방황하던 고어에게 환경문제에 대한 관심을 되살려보라고 조언한 것은 티퍼였다고 한다. 결과적으로 ‘환경’은 고어를 다시 살려냈다. 다큐멘터리 ‘불편한 진실’로 오스카상을 탔고 노벨평화상까지 수상했다. 하지만 고어가 환경 전도사로 전 세계를 돌아다니면서 부부는 점점 떨어져 지내고 둘 사이가 점점 멀어져 오늘에 이르렀다고 한다.
어떤 결혼도 상처 없는 결혼은 없다. 부부가 평생을 살다보면 배우자의 잘못, 예상치 못했던 상황, 다른 가족과의 관계 등으로 아픔을 겪게 된다. 아픔을 겪는다고 해서 모두 이혼을 하는 것은 아니다. 대표적인 예가 클린턴 부부 케이스다. 자존심 높기가 하늘같은 힐러리가 남편의 습관적 외도라는 수모를 칼을 삼키듯 삼켰다. 클린턴 부부에게는 고어 부부에게 없는 강력한 접착제가 있기 때문이다. 부부가 공유한 정치적 야망이다.
결혼을 지탱하는 것은 결국 ‘필요’가 아닐까. 사람은 이기적인 동물이고 결혼도 예외일 수 없다. 가장 강력한 것은 사랑. 그 존재 자체에 대한 필요다. 그가 없으면 도저히 살수 없을 것 같으니 결혼을 하고 결혼을 유지한다. 이어 자녀양육의 필요, 경제적 필요, 정서적 안정의 필요, 그러다 건강이 나빠지면 간호의 필요 등으로 부부는 한평생 한몸으로 산다. 배우자와 백년해로하고 싶다면 그에게 어떻게든 필요한 존재가 되는 것이 비결이다.
권정희 논설위원
junghkwon@koreatime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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