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이 이뤄지려면 죽는 수밖에 없다는 것은 트리스탄과 이졸데와 로미오와 줄리엣의 죽음에서 깨달을 수 있는 운명이다. 특히 로미오와 줄리엣의 죽음은 이제 열너댓 살된 철없는 것들의 죽음이어서 아름다울 정도로 비극적이다. 사랑이란 어쩌면 이렇게 세상물정 모르는 순진한 어린 것들의 가슴에서만 생존할 수 있는 것인지도 모른다.
사랑을 하게 되면 물불을 안 가린다더니 어린 것들이 독약과 단검으로 제 목숨들을 끊은 것을 생각하면 살아서 사랑한다고 떠드는 우리들이 계면쩍어진다.
이탈리아 베로나의 줄리엣의 집을 방문, 줄리엣이 로미오를 그리워하며 “오 로미오, 로미오 님은 어찌하여 로미오인가요”라고 나이팅게일처럼 읊조리던 발코니(사진) 밑에 서니 주위를 둘러싼 현실이 극으로 변한다. 발코니를 올려다보면서 사랑에 달아오른 로미오의 심정을 헤아려보자니 나의 세월들이 가슴에까지 와 닿는다.
집 뜰에 있는 줄리엣 동상의 오른쪽 젖가슴은 방문객들이 하도 어루만져 금빛 색깔이 벗겨진 채 반짝반짝 윤이 난다. 나는 가슴을 어루만지고 그 가슴에 입까지 맞추었는데 손바닥 만한 마당에 관광객들이 빼곡히 들어차 시장바닥을 이루고 있었다.
줄리엣의 집에 들어오는 입구 양쪽 벽에는 줄리엣에게 보내는 사랑의 하소연을 적은 편지들이 덩굴처럼 덮고 있다. 로미오와 줄리엣은 허구이련만 그것을 믿으려는 사람들의 심정이 참으로 갈급하게 느껴졌다. 하긴 사랑이란 허구인지도 모른다.
로미오와 줄리엣의 얘기는 영화로도 여러 번 만들어졌다. 그 중에서도 뛰어난 것은 둘 다 나이 먹은 레슬리 하워드와 노마 쉬어러가 나온 ‘로미오와 줄리엣’(1936)과 당시 각기 나이 17세와 15세였던 레너드 와이팅과 올리비아 허시가 나온 ‘로미오와 줄리엣’(1968).
프랑코 제피렐리가 감독한 1968년 작은 의상과 세트와 컬러 그리고 젊은 배우들의 열띤 연기 및 니노 로타의 달콤하고 서럽게 아름다운 음악 등 모든 것이 훌륭한 명작이다.
베를린을 떠나 지난 1일 감상적인 로맨스 영화 ‘줄리엣에게 보내는 편지’(현재 상영중)의 배우들과의 인터뷰 차 베로나에 도착했다. 인구 24만 정도의 도시 베로나는 모든 것이 낡아 곧 무너져 내릴 것만 같았다. 냄새마저 낡은 냄새가 난다.
우리가 묵은 좁은 골목길 비아 아두아에 있는 호텔 빅토리아는 로마시대 별장을 개수한 것인데 별장에 사용된 역사의 곰팡이가 슨 로마 돌들을 신주단지 모시듯 간수하고 있었다.
호텔을 빠져 나오면 또 다른 골목과 골목이 이어지면서 이어 광장이 나온다. 이탈리아의 도시 구조가 다 이런가 본데 돌투성이 고도의 골목 양 옆으로 루이 뷔통을 비롯해 최고급 패션 상점들이 늘어서 고약한 불균형을 이루고 있었다.
관광객들로 복작대는 거리를 걷다 보니 ‘줄리에타와 로메오’라는 이름의 호텔과 식당이 눈에 띈다. 나는 로미오보다 줄리엣이 더 매력적인 인물이라고 생각해 줄리엣을 로미오 앞에 놓은것이 마음에 들었다.
좀 과장해서 몇 집 건너 성당인데 고풍 창연한 한 성당의 문이 열려 있어 안으로 들어갔다. 높은 돔 천장과 양쪽 벽에 성화가 그려 있는 성당에서는 저녁미사가 진행 중이었다. 나도 신도들과 함께 자리에 앉아 잠시 감사하고 편안한 시간을 가졌다.
도착한 이튿날은 3만명 이상을 수용할 수 있는 옥외 극장 아레나를 찾아갔다. 로마의 콜러시엄 모양인데 이곳은 프랑코 제피렐리가 연출하는 오페라로 유명한 곳이다. 아레나 앞에 ‘투란도트’ ‘아이다’ ‘나비부인’ ‘카르멘’ 및 ‘라 트라비아타’가 공연된다는 포스터가 보인다.
시골역 같은 베로나 공항에 도착했을 때 구내에 피라밋과 비올레타의 세트 형상이 있는 것을 보고 그 앞에서 기념사진을 찍으면서 의아하게 생각했었는데 아레나를 찾고 나서야 그 이유를 알게 됐다.
돈을 내고 아레나에 들어가 돌계단에 앉아 기원 후 30년에 건축된 이 극장에서 로마 사람들은 무슨 쇼와 경기를 구경했을까 하고 궁금해 했다. 고대 관중들의 “와 와”하는 함성이 환청처럼 들린다. 내가 간 날은 저녁에 알리시아 키즈의 공연이 있어 무대를 설치하느라 방망이 소리가 요란했다.
오후에는 비가 내렸다. ‘줄리엣에게 보내는 편지’에 나온 아만다 사이프리드와 크리스 이간 및 가엘 가르시아 베르날 등과의 인터뷰를 마친 뒤 저녁 어둠 속을 우산을 받고 걸었다. 노천카페에 앉아 외이트 와인을 마시며 광장을 바라보니 제법 세차게 내리는 빗소리가 역사의 발음 같이 들렸다. 내일이면 LA로 돌아가는 날. ‘아리베데르치 베로나’.
박흥진 편집위원
hjpark@koreatime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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