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에 살면서 부담이 덜한 것 중의 하나는 ‘내 집 장만’이다. ‘내 집’이 아메리칸 드림의 대표적인 것이기는 하지만 한국에서처럼 절대적이지는 않다. 한국의 젊은 세대가 직장 잡고, 결혼하고 나면 그 다음 필히 도달해야 할 고지는 ‘집 장만’이다.
그래서 한국의 직장에서는 재미있는 현상이 나타난다. 똑같은 직장에서 똑같은 월급 받는 동료들이 두 부류로 나뉘는 것이다. 돈 천원을 아끼는 부류와 씀씀이가 자유로운 부류이다. 전자는 집 장만을 위해 주택적금 붓느라 허리띠를 졸라매는 집단, 후자는 이미 ‘내 집’이 마련되어 있는 집단이다. 부모가 경제적으로 여유가 있어서 집을 장만해준 케이스이다.
간단하게 정리하면 전자는 ‘가난한 아버지’ 후자는 ‘부자 아버지’를 둔 부류이다. 살아가면서 “아버지를 잘 만나야…" 라는 농담 반 진담 반의 푸념이 나오는 여러 정황 중의 하나이다.
선택이 가능하다면 세상사람 누구나 갖고 싶은 것이 ‘부자 아버지’일 것이다. 그런 부자 아버지를 실제로 가진 아들이 책을 펴냈다. 세계 2~3위를 다투는 부자, 돈 불리기의 현자로 불리는 워렌 버핏(79)의 막내아들 피터 버핏(52)이다.
에미상 등 다양한 수상경력의 대중 음악가인 그가 ‘삶은 스스로 만들어 가는 것’ 이라는 책을 내고 홍보를 위해 전국을 순회 중이다. 삶은 부자 아버지의 등에 업혀 가는 것이 아니라 내 발로 걸어가는 것이라는 일종의 ‘간증’이다.
수십년 음악활동에만 전념해온 그가 책을 쓰게 된 데는 계기가 있었다. 부자들 대상 자산관리 세미나에서 자녀교육에 관한 강연을 해달라는 청탁을 여러 번 받았었다. 부자들에게는 어떻게 하면 자녀를 돈으로 망치지 않고 잘 키울 수 있을까가 고민거리이기 때문이다. 강연을 몇 번 하다 보니 그 내용을 책으로 써보라는 제의가 들어왔다.
그가 돈 많은 부모들에게 주는 조언은 간단하다. 자녀들이 달라는 대로 다 주지 말라는 것, 돈 대신 가치관을 심어주라는 것이다. 자녀들이 스스로의 삶을 찾아 나서고, 그러다 넘어지고, 그리고는 다시 일어나는 법을 배울 소중한 기회를 박탈하지 말라는 것이다.
그는 그 누구의 아들이 아닌 자기 자신으로 자신의 것을 성취해낸 것에 자부심을 느낀다. 그리고 이 모두는 ‘은 수저’가 까딱 잘못하면 ‘은 비수’가 되어 등을 찌른다는 아버지의 가르침 덕분이라고 말한다. 부의 상징인 은수저를 입에 물고 태어나는 것은 분명 축복이지만 그 특권의식에 취해 살다보면 파멸이 도래한다는 의미이다.
모든 제국·왕조의 흥망성쇠는 기본적으로 같다는 이론이 있다. 시작은 강인한 정신과 용맹스런 기세다. 강한 정신력으로 똘똘 뭉치면 나라는 풍요로워지고 힘이 생긴다. 부와 권력이 쌓이다보면 사치가 등장하고, 사치는 타락과 부패를 불러오면서 쇠망의 길로 접어든다는 것이다.
개인의 차원에서 보면 “부자가 3대를 못 간다" 말이 된다. 첫 대가 근면과 성실로 자수성가해 부를 일궈 놓으면, 땀 흘리지 않고 부를 이어받은 다음 대는 사치에 빠지기 쉽고, 은수저 물고 태어난 그 다음 대쯤 되면 향락에 절어 패가망신하는 일이 다반사여서 생긴 말이다.
‘부자 3대’의 2대에 해당하는 피터 버핏에게도 위태로웠던 시기가 있었다. 그는 스탠포드에 재학 중이던 19살 때 할아버지로부터 유산을 받았다. 농장을 물려받았는데 ‘돈을 놀리는 것을 못 참는’ 아버지가 9만 달러에 팔아서 주식으로 바꿔주었다. 돈이 생긴 그는 학교를 중퇴하고, 샌프란시스코로 가서 악기를 사고 녹음 시설을 사들였다. 음악을 좋아해서 음악의 길을 추구했지만 사실상 방황이었다.
“내가 어디로 가고 있는지 모르던, 길을 잃고 헤매던 시기였다"고 그는 회고한다. 지금 가치로 하면 20-30만 달러에 달하는 유산을 몇 년 만에 다 써버린 모양이었다. 20대 때 재정적으로 너무 어려워서 아버지에게 돈을 빌려달라고 했다가 거절당했다고 한다. 도와주지 않는 아버지에게 당시에는 몹시 화가 났었지만 지나고 보니 감사한 일이었다고 그는 말한다. 아버지의 거절은 “내 도움 없이도 너는 혼자 힘으로 할 수 있다"는 믿음의 메시지였다는 것이다.
“때로는 가장 가난한 사람이 자녀들에게 가장 풍요로운 유산을 남긴다"는 말이 있다. 헝그리 정신이 자수성가의 기본조건이기 때문이다. 반면 지나친 부는 정신의 독이 된다. 없어서 못 주는 것이 ‘가난한 아버지’의 아픔이라면, 있는데도 주지 말아야 하는 것이 ‘부자 아버지’의 어려움이다. 은수저가 자녀를 찌르는 비수로 바뀔 수 있기 때문이다.
권정희 / 논설위원
junghkwon@koreatime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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