셰익스피어 시대 정치스릴러 ‘익명’(Anonymous)의 세트 방문차 들른 베를린을 떠나는 지난 1일 아침 나는 강행군 여정에 다소 피곤했지만 아침 일찍 숙소를 나와 베를린 시내를 관통하는 운터 덴 린덴(보리수 아래) 블러버드를 따라 걸었다.
옛 동독 땅에 있는 호텔 앞의 4두마가 꼭대기에 올라 선 브란덴부르크 문을 통과해 슈베르트의 ‘보리수’를 속으로 노래 부르며 보리수가 우거진 티어가르텐을 지나 20여분 만에 ‘지게스조일레’(승리의 기둥·사진)에 도착했다. 내가 잠을 쫓고 이 기념상을 찾은 이유는 빔 벤더스 감독이 분단 베를린에 바치는 명상시인 ‘욕망의 날개’(1987)에서 인간이 되고 싶어 안달이 난 천사 다미엘(브루노 간츠)을 혹시나 만날 수 있을까 해서였다.
다미엘은 높은 원주 위에 세워진 머리에 월계관을 쓴 금색 천사의 오른 팔 위에 걸터앉아 밑의 인간들을 내려다보면서 자기도 감각하고 사랑할 수 있는 인간이 되고 싶어 했다. 영화의 독일어 제목인 ‘베를린 위의 하늘’을 쳐다보며 다미엘을 찾아 봤지만 그는 이미 인간이 되어 이제는 통일이 된 베를린의 어느 한 곳에서 살고 있을 것이다.
구독일 통일을 기념해 1873년에 세워진 ‘승리의 기둥’은 보수 중이었는데 미관을 위해 기둥 아래를 둘러싼 가리개에 한국어로 ‘환영합니다’라고 적혀 있다.
베를린 방문은 이번이 세 번째로 나는 이 도시에 오면 분단 조국을 생각하게 된다. 통일 독일에서 분단 한국을 생각하는 마음이 막연하고 쓸쓸하다. 베를린이 부럽고 독일이 부럽다. 함께 여행한 할리웃 외신기자협회(HFPA)의 독일인 동료 한스가 내게 “H.J.(내 영어 이름) 언젠가 한국도 통일이 될 거야”라고 일종의 위로의 말을 하는 데도 가슴은 여전히 무겁다.
베를린을 떠나기 전날은 오전에 단체로 얼마 남지 않은 베를린 장벽을 포함한 시내 구경과 함께 나치가 유대인 말살을 논의한 장소인 반제, 냉전시대 동서양의 스파이 교환 장소인 글리니커 다리 그리고 포츠담회담이 열린 세실리엔호프 성 및 프리드릭 대왕의 여름별장인 산 수시 등을 방문했다.
그러나 외지에서의 여객의 고적한 기쁨은 혼자 무작정 걷는 것이다. 오후에 나는 보물찾기 하는 심정으로 전 면적의 30%가 녹지대인 베를린 시내 답사에 나섰다.
우선 독일을 무척 좋아해 음악을 듣기 위해 이 나라를 종종 방문하는 내 친구 C가 얘기하던 베를린의 3대 오페라 하우스를 찾아 나섰다. 호텔 근방의 코미쉬 오퍼 베를린과 운터 덴 린덴의 베를린 슈타츠 오퍼는 쉽게 찾았는데 나머지 도이체 오퍼 베를린은 다음에 찾기로 했다.
이어 분단시대 ‘노 맨즈 랜드’였던 포츠담 광장에 세워진 베를린 필의 본부인 필하모니엘 들렀다. 오페라나 필하모닉의 프로가 마음에 들면 관람할 작정이었는데 그렇지가 않았다.
독일에 와서 맥주를 안 마시는 것은 인사치레가 아니어서 광장 노천카페의 보리수 아래 앉아 겉에 줄이(진짜 술과 거품의 경계) 그어진 잔으로 맥주를 마시며 노독을 푸는데 보리수가 시원하게 부채질을 해 준다.
베를린은 HFPA의 또 다른 독일인 동료인 엘마가 말한 대로 시내가 폭격에 몽땅 파괴돼 사실 오래된 것이 거의 없고 신축 건물이 많지만 녹지대와 강과 함께 폭격에서 무사한 오래된 건물들이 옛 것과 새 것의 오묘한 조화를 이루고 있다.
런던을 떠나 베를린에 도착한 지난달 29일 숙소에 짐을 푼 뒤 ‘익명’의 촬영장인 구동독 땅에 있는 바벨스베르크 스튜디오를 방문했다. 이 스튜디오는 프리츠 랑의 ‘메트로폴리스’(1927)와 요젭 폰 슈테른베르크가 감독하고 마를렌 디트릭이 주연한 ‘푸른 천사’(1930) 등 많은 명화들을 산출한 우파(UFA) 스튜디오를 인수해 새 스튜디오로 쓰고 있다. 벽돌 건물에 구동독 때 써놓은 ‘동무들 당신들이 일할 때 항상 5개년 계획을 생각하시오’라는 구호가 남아 있다.
올해 초 개봉돼 빅히트를 한 지구 종말 영화 ‘2012’를 만든 독일인 롤랜드 에머릭 감독이 만드는 ‘익명’은 셰익스피어의 신원의 진부를 둘러싼 논란에 관한 이야기다. 셰익스피어가 쓴 연극들은 사실은 그가 쓴 것 아니고 다른 사람이 썼다는 주장과 함께 엘리자베스 여왕의 정략과 궁중 권력다툼을 섞어 정치적 스릴러로 만든다고 에머릭 감독은 말했다.
세트 방문 후 셰익스피어의 연극이 공연된 글로브 극장을 재생한 세트에서 감독 및 바네사 레드그레이브 등 출연진과의 기자회견이 있었다. 옛 의상을 입은 엑스트라들이 풍악이 울리는 중에 우리를 맞아 잠시 과거로 시간여행을 하는 듯했다.
베를린을 떠나 다음 행선지인 이탈리아의 베로나로 향하는 날 아침 베를린 위의 하늘은 천사 다미엘의 하늘처럼(영화에서 천사의 장면은 흑백이고 인간의 장면은 컬러다) 구름 낀 잿빛이었다. ‘아우프 비더젠 베를린’.
박흥진 / 편집위원
hjpark@koreatime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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