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번 폭설로 쓰러져 넘어온 뒷집의 나무들은 한달이 더 지나서야 치워졌다. 두집 사이에는 여남은 그루의 전나무가 심어져 있었는데 몇시간의 시간차를 두고 두 나무가 같이 쓰러졌다. 혹 그들은 어깨를 겯고 살던 부부였는지도 모르겠다. 스무살을 못 채운 성성한 나무에 전기톱이 닿는 소리는 남은 나무들을 파르르, 긴장에 떨게 했다. 나무가 치워지고 망가진 휀스를 빼내고 나니 두 집 사이에는 휑하니 구멍이 뚫려 버렸다.
햇빛이며 달빛, 바람, 꽃향기같이 나눌 것은 나누어 주고 가릴 것은 또 적당히 가리워 주던 그 나무들이 서있던 자리에서 얼굴도 모른 채 살고 있던 두 집이 만나 인사를 했다. 뒷집엔 초로의 독일인 노부부가 살고 있었다.
그분들은 원래 숲이었던 우리 집자리의 풍광에 반해 집을 샀노라 했다. 어느 집자리인들 처음엔 숲이 아니었을까. 미국의 집들도 이제는 뒷풍광에서 숲을 보기가 점점 어려워져 가고 있다.
나무가 쓰러졌을 때 제일 걱정된 건 쓰러진 나무 밑에 깔려 있을 꽃나무 한그루였다. 화원에 가서 이름을 알아오리라 미뤄둔 세월에 다섯살이 되어버린 나무, 다행히 폭설의 상처가 어깨죽지에 남아 있기는 했지만 나무는 옴쑥옴쑥 꽃 피울 준비를 하고 있었다.
다섯해 전, 어머님이 오셨었다. 멀리 떨어져 태어난 아이들의 달콤한 숨결이며 팔다리 사부작거리는 소리에라도 전화기를 대보라시던 어머님, 그 어머님이 정작으로 아이들 곁에 오셨을 땐 아이들은 훌쩍 자란 뒤였고 나름으로 바빠진 아이들은 곁을 내주지 않았다. 비자 기간이 끝나고 아쉬운 마음으로 미국을 떠나시면서 어머님은 우리들에게 나무를 한 그루 선물하고 싶어 하셨다. 지병 때문에 몇발자국만 움직여도 숨이 가빠지시던 어머님은 한나절이 넘게 화원의 묘목 사이를 서성이셨다. 그리고 이제 막 꽃망울을 맺기 시작한 꽃나무를 하나 고르셨다. 어머님은 식구들의 식탁이 마주보이는 곳에 그 나무를 심고 싶어 하셨다. 뒷집의 무성한 전나무들이 그늘을 만드는 곳이라서 염려가 되었지만 그렇게라도 우리를 지켜보시고 싶어 하시는 어머님의 마음자리를 옮길 수가 없어 그 자리에 나무를 심었었다.
누구에게나 나무에 대한 추억이 하나쯤은 있을 것이다. 유년기를 지낸 옛집의 풍경 가까이에, 혹은 학교 교정의 측백나무 늘어선 길이며 보랏빛 수수꽃다리(라일락)의 꽃그늘, 혹은 첫사랑과 걷던 밤길에 푸르던 플라타너스, 도심의 좁은 양옥집 한켠에도 식구들과 함께 호흡을 나누던 나무가 한그루쯤은 서있지 않았던가.
추억할 수 있는 나무들이 많은 사람은 행복하다. 나도 그 행복한 사람 중의 하나이다. 수세미 덩쿨이 같이 따라 올라가 있던 펌프샘 위의 청포도나무, 펌프물에 머리 감으며 쓰라린 비누거품을 씻으러 얼굴을 들었을 때 마주치면 하얗게 웃어주던 마당가의 사발꽃나무, 그 옆의 석류나무, 뒤란에는 톳톳, 노란 통꽃을 떨어트려 목걸이를 만들게 해주던 감나무와 초여름밤이면 하얀 꽃내가 집 허리를 감싸돌던 밤나무가 몇 그루, 그리고 늙은 살구나무도 한 그루 있었다.
대문간을 나서면 개복사나무와 늦봄이 되어서야 연두빛 작은 이파리를 내놓던 대추나무도 있었고 개울 지나 저수지 가는 길에는 하얀 싸리나무 군락도 있었다. 비탈밭 둔덕에는 가지마다 꽃핀처럼 다닥다닥 작은 꽃을 매달던 고욤나무, 마실 가는 할머니를 따라나선 그믐의 밤길에 두둑,하고 못생긴 열매를 떨어트리던 모과나무의 검은 그림자, 친구랑 같이 따먹으며 까맣게 물든 입술에 서로 웃어주던 오디나무, 보리똥하면서 따먹던 달짝지근한 보리수나무, 옆집 바깥마당 끝에 가을이 오면 바람 따라, 빗줄기 따라 노란 은행잎이 까무룩하게 떨어져 내리던 백년 넘은 은행나무도 있었다.
어느 마을이든 동구밖 초입에는 뛰어노는 어린것들의 숨결과 고된 어른들의 체온이 묻어 있는 느티나무가 한 그루 서 있었다. 나무는 불확실한 미래로의 꿈을 향해 떠나는 젊은이들의 뒷모습을 말없이 지켜보기도 했다. 훗날 그들이 다시 돌아가고 싶어 하는 고향의 따뜻한 풍경, 그 한가운데에는 늘 느티나무가 서 있다.
그 많은 나무들 중에서도 오동나무를 떠올리면 뒷간과 할머니가 생각난다. 연보랏빛 통꽃을 잎사귀 밑으로 조르르 숨겨 피우던 오동나무는 집 모퉁이의 뒷간에 바투게 심어져 있었다. 커다란 잎사귀 서너장을 따내어 뒷간에 던져 넣으면 구더기도 덜 끓고 냄새도 덜 나던 오동나무, 밤이 오면 달빛이 그 넓은 오동나무 잎사귀 위에서 미끄럼을 타기도 했다. 뭘 잘못 먹었는지 배탈이 난 한밤중에 뒷간에 가고 싶어지면 뒷간에 기대어 있는 오동나무의 시커먼 그림자가 먼저 떠오르며 무서워졌다. 그런 밤이면 나는 늘 마루에 나가 사랑채의 할머니를 불렀다. 뒷간 문을 열어놓은 채 할머니까지 보초를 세워 뒀지만 밤의 뒷간은 무섭기만 했다. 나는 자꾸 할머니의 존재를 확인하느라 할머니를 불러댔다. “할머니, 거기 있지? 가지 마. 가면 안돼.” 선하품을 하시느라 대답이 늦어지면 와락 겁이 났다. 때마침 대숲을 지나가는 바람에 쏴아쏴아 대이파리 쏠리는 소리가 들리면 엉덩이에 쌀톨만씩한 소름이 돋았다. “ 할머니, 노래 불러봐. 빨리이-” 말을 시키는 것보다 더 확실한 방법을 생각해낸 손주가 어이없으셨는지 할머니는 웃음 섞어, 하품 섞어, 그 밤 긴 노랫가락을 늘어 놓으셨다.
댓잎소리 스산하던 그날 밤의 뒷간에서 나를 지켜주던 할머니, 그 할머니는 이후로도 어둡고 후미진 내 삶의 구비마다에서 나를 지키주셨다. 단조의 느린 가락으로, 따뜻한 기척으로 내 겨드랑이에 손을 넣으시고 때때마다 나를 일으키셨다.
내 추억속의 나무들은 이제 거기 없을지도 모르겠다. 딸을 낳으면 오동나무를 심었다던 이야기는 뒷간에 살았다던 몽당귀신과 함께 사라진 지 오래이다. 또한 계절에 관계없이 과일이 넘쳐나는 세상에서 굳이 나무 꼭대기에 매달린 벌레 먹은 개복숭이나 딱딱한 돌배를 올려다보며 목젖 떨어지는 아이들도 찾아보기 힘든 세상이 되었으니 말이다.
내가 오동나무와 함께 할머니를 기억하듯이, 내 아이들에게도 추억 속에 세워 둘 나무가 한 그루쯤 있었으면 좋겠다. 그 나무가 지난 겨울의 폭설 밑에서도 살아나 이제 막 연분홍 꽃잎을 터트리기 시작한 저 나무라면 더 좋겠다. 넘어지고 쓰러질지도 모르는 삶의 구비마다 괜찮다 괜찮아 툭툭, 등을 다둑이며 나무가 말을 걸어오는 소리를 들을 수 있다면 더더욱 좋겠다.
댓글 안에 당신의 성숙함도 담아 주세요.
'오늘의 한마디'는 기사에 대하여 자신의 생각을 말하고 남의 생각을 들으며 서로 다양한 의견을 나누는 공간입니다. 그러나 간혹 불건전한 내용을 올리시는 분들이 계셔서 건전한 인터넷문화 정착을 위해 아래와 같은 운영원칙을 적용합니다.
자체 모니터링을 통해 아래에 해당하는 내용이 포함된 댓글이 발견되면 예고없이 삭제 조치를 하겠습니다.
불건전한 댓글을 올리거나, 이름에 비속어 및 상대방의 불쾌감을 주는 단어를 사용, 유명인 또는 특정 일반인을 사칭하는 경우 이용에 대한 차단 제재를 받을 수 있습니다. 차단될 경우, 일주일간 댓글을 달수 없게 됩니다.
명예훼손, 개인정보 유출, 욕설 등 법률에 위반되는 댓글은 관계 법령에 의거 민형사상 처벌을 받을 수 있으니 이용에 주의를 부탁드립니다.
Close
x