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집에는 두개의 대문이 있었다. 바깥마당을 지나 큰길로 향해 나 있는 큰대문과 개울물과 비탈밭을 품고 있는 뒷산으로 향해 나 있는 작은대문, 모양새나 크기는 비슷했지만 한집에 두 대문이 있으니 그렇게 구분지어 불렀다. 앞산에 뿌연 해가 막 떠오르기 시작할 무렵이면 할아버지는 밤새 질러져 있던 대문의 빗장을 차례로 풀어내셨다. 삐이걱,하고 대문이 열리던 소리는 아침이 왔으니 어서들 일어나라는 소리였다. 집안을 향한 그 거역할 수 없는 통과의례 소리에 식구들은 물론이고 뒤안의 늙은 살구나무마저도 선잠에서 깨어나느라 푸르르 잔가지를 떨었다.
아스라하게 동구밖이 내다보이던 큰대문을 통해 우리들은 학교를 다녔고 어른들은 오일장이나 대소사에 출입을 하셨다. 가끔 기별없는 손님이 찾아오시기도 했는데 그런 날이면 한쪽 신발을 채 걸치지 못하신 할머니의 반가움이 대문간을 향해 기우뚱거리며 달려나갔고 시집간 딸을 배웅하며 동구밖까지 조촘조촘 따라 나섰던 할머니가 젖은 눈시울로 오래도록 붙잡고 서계시던 것이 또한 큰대문이었다.
작은대문은 주로 할아버지가 드나드셨다. 푸작나무를 한짐 지고, 흙 묻는 논일을 마치고, 두엄더미를 실어내시고, 돌아오실 때면 늘 개울물에 손발을 닦고 오셨다. 그래서 언제나 질컥이는 고무신 소리가 할아버지보다 한발 앞서 작은대문을 넘곤 했다. 큰대문간은 언제나 정갈하게 치워져 있었지만 작은대문간에는 쇠죽솥이 걸려 있었고 갖가지 연장이 걸려 있었으며 그 한켠은 나무청이 차지하고 있었다. 할아버지가 손수 지으신 그집의 작은대문 문턱은 할아버지의 나이를 따라 완만하게 또 소리없이 닳아져 갔다.
겨울이 떠날 채비를 하고 미온의 봄볕이 동구밖을 서성이기 시작하면 할아버지는 봄을 초대하는 입춘방을 크게 써서 두 대문에 붙이셨다. 할아버지의 입춘방으로 시작된 봄은 서걱거리며 얼어 있던 흙을 부드럽게 풀어주고 나무들은 가지 끝마다 젖꼭지같은 몽우리를 매달았다. 그 봄이 찾아오고 나면 학교에서 돌아온 나를 반기는 건 텅빈 집안을 지키고 있는 적막뿐이었다. 빈 바지랑대만 걸려 있던 앞마당, 드문드문 들려오던 낮부엉이 소리, 그런 날이면 나는 작은대문을 팔랑 뛰어넘어 산비얄로 내달렸다. 지칭개가 지천인 저수지 둑을 오르면 영락없이 하얀 등허리를 내보이며 비탈밭에 앉아 계시던 어른들이 한눈에 들어왔다. 봄볕이 서늘해질 때에야 일어서실 어른들을 기다리며 밭둑에 쪼그리고 앉아 생강나무꽃과 봄풀로 꽃밥과 풀반찬을 만들며 놀다보면 밭둑 너머 선산에서도 낮부엉이가 울어댔다.
식구들이 다 모여 저녁을 먹고 난 뒤에도 우리집 대문은 그대로 열려 있었다. 작은대문 밖 외양간의 소가 아직 잠들지 않은 까닭이요, 행여 마실을 오실지도 모르는 동네 어른들의 발길 때문이었다. 밤이 깊어서야 할아버지는 헛기침 소리를 내시며 앞마당을 가로질러 다시 삐이걱, 소리를 내며 대문을 닫고 달그락-닥, 빗장을 지르셨다. 그 소리에 토방 위 누렁이는 마루 밑으로 들어가고 마당에 흥건하던 달빛은 숨을 죽였다. 그 달빛 아래 살피듬이 오른 겨드랑이마다 꽃잎을 피워 내던 마당가의 박태기나무도 소스라치며 잠들 채비를 했다. 그리고 끝으로 집안의 모든 불이 꺼졌다. 대문이 닫히는 소리, 그 소리는 이제 밤이 깊었으니 모두 잠자리에 들라는 무언의 지시였다. 대문을 열고 닫는 일은 할아버지 고유의 보살핌이자 한집안을 통솔하는 권위의 상징같은 것이기도 했다.
황아장수나 동냥자루를 든 걸인에게까지도 활짝 열려 있던 대문을 넘지 못하는 것이 한가지 있었으니 바로 불길한 통보인 부고장이었다. 처음 태어났을 때는 세이레 동안이나 고추 달고 솔잎 달아 좋은 기별의 금줄로 내걸렸던 대문, 하지만 불귀의 객이 되어 떠나면서 남긴 한장의 부음은 그 어떤 대문도 넘지 못했다.
돌담 틈에 끼워 있는 부고장을 발견하신 할아버지는 누런 부고봉투를 들고 집 밖을 에둘러 바깥뒷간으로 가셨다. 작은대문 너머 외따로 지어져 있던 그 뒷간은 주로 할아버지가 사용하시는 공간이었다. 부정한 모든 것들로부터 식구들을 품어 보호하고 싶었던 할아버지는 자신만의 공간 옆에 귀신이 싫어한다는 왼새끼줄을 매달아 부고장들을 엮어 놓으시곤 했다. 이미 하얗게 탈색된 부고봉투들 틈에 새 부고장을 하나 더 추가하시던 할아버지, 만감이 교차하셨을 법도 한데 헛기침을 두어번 하셨을 뿐 그날의 할아버지 뒷모습은 완강하셨다.
일흔 일곱 해, 태어나신 그 동네를 떠나신 적이 없던 할아버지도 끝내는 한장의 부음이 되셨다. 의식이 없던 상태에서도 고모가 넣어 드린 쌀밥 한숟갈을 애써 넘기신 뒤 한숨을 길게 내쉬고 긴 세월, 한집안을 거느렸던 대주로서의 역할에서 손을 놓으셨다. 큰대문 밖의 바깥마당을 한바퀴 휘이 돌아, 작은대문 앞에 잠시 멈춰 서서 고단했던 삶이 드나들던 문턱에 작별을 고하고 비탈밭이 내려다보이는 선산으로 향하신 할아버지는 그 후로도 오랫동안 우리식구들 마음의 대주자리에 앉아 계셨다.
창밖에 명주실같은 봄볕이 내려앉기 시작하는 아침나절, 할아버지의 입춘방이 붙여지지 않아도 옛날 그집의 마당가엔 박태기나무꽃이 밥티처럼 몽우리를 맺고 선산 밑, 그 밭둑엔 내 손에 쌔한 생강냄새를 배이게 하던 생강나무가 그때처럼 샛노란 꽃들을 보풀보풀, 보푸라기처럼 피워내고 있을지도 모르겠다.
숙명처럼 작은아들로 태어나 큰아들에게 모든 것을 양보하시고 밖의 세상으로 나 있는 큰대문보다는 고된 일거리를 향해 열려 있던 작은대문을 많이 사용하셨던 할아버지, 자식들을 큰대문 너머 대처의 세상으로 다 떠나보내고도 섭섭한 기색 없이 여전히 남은 생애를 작은대문에 기대고 사셨던 할아버지의 삶은 바로 그 작은대문을 닮아 있었다. 그 할아버지가 문득 그리워지는 봄날이다. 아니, 할아버지를 그리워 하기엔 가신 세월이 너무도 멀고 내가 그리운 건 할아버지가 여닫으시던 대문 소리인 것 같기도 하다. 혹은 내가 정작으로 그리운 건 대문 소리 하나로 한집안을 통솔하시던, 이 시대가 잃어버린 대주의 권위같은 것일지도 모를 일이다.
댓글 안에 당신의 성숙함도 담아 주세요.
'오늘의 한마디'는 기사에 대하여 자신의 생각을 말하고 남의 생각을 들으며 서로 다양한 의견을 나누는 공간입니다. 그러나 간혹 불건전한 내용을 올리시는 분들이 계셔서 건전한 인터넷문화 정착을 위해 아래와 같은 운영원칙을 적용합니다.
자체 모니터링을 통해 아래에 해당하는 내용이 포함된 댓글이 발견되면 예고없이 삭제 조치를 하겠습니다.
불건전한 댓글을 올리거나, 이름에 비속어 및 상대방의 불쾌감을 주는 단어를 사용, 유명인 또는 특정 일반인을 사칭하는 경우 이용에 대한 차단 제재를 받을 수 있습니다. 차단될 경우, 일주일간 댓글을 달수 없게 됩니다.
명예훼손, 개인정보 유출, 욕설 등 법률에 위반되는 댓글은 관계 법령에 의거 민형사상 처벌을 받을 수 있으니 이용에 주의를 부탁드립니다.
Close
x