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무리 연구가 중요해도 목숨과 바꿀 건 아닌 데 …
지난주 한국의 유명 물리학 교수가 투신자살했다는 소식이 전해지자 주변에서 들리는 말이다.
한국에서는 지난 한달 사이 첨단과학기술 분야의 중추적 인물 둘이 자살을 했다. 1월말 삼성전자의 이원성(51) 부사장이 자살했고, 2월말에는 서강대학교의 이성익(58) 교수가 자살했다. 이 부사장은 삼성전자의 반도체 신화를 이끌어온 인물, 이 교수는 초전도체 분야에서 한국 내 최고 석학으로 꼽히던 인물이었다.
한사람은 삼성그룹 최고 엔지니어의 상징인 삼성 펠로우에 선정되었고, 또 한사람은 한국의 노벨상으로 불리는 한국 과학상을 수상했다. 사람이 생애 중 이룰 수 있는 최고 수준의 업적과 영예를 누리며 후진의 역할모델이 되었던 인물들이었다.
그 두 사람이 추운 겨울날 자기 집 고층아파트에서 떨어져 죽었다. 투신자살은 자살 중에서도 가장 적극적인 선택이다. 가장 확실하게 죽을 방법으로 그들은 목숨을 끊었다.
사건의 무대가 한국이지만 미주한인들에게도 먼 일이 아니다. 세계가 한 마을이 된 지금 한국과 미국이 이렇게 가까웠던 때가 없었다. 그들과 대학을 같이 다닌 동창들, 미국 유학시절 같이 지냈던 사람들이 있고, 가족은 미국에 살지만 가장이 한국의 기업이나 대학에서 일하는 케이스들도 적지 않다. 한두 다리 건너면 알만할 사람들이니 그들의 죽음에 안타까움이 깊다.
그들은 왜 죽음을 택했을까? 우선 꼽히는 것은 연구 성과와 실적의 중압감이다. 첨단과학 분야 종사자들은 “이대로 있다가는 내가 죽겠다 싶은 극한의 스트레스를 경험하는 일이 드물지 않다고 한다.
이 교수의 주머니에서는 “물리학을 너무나 사랑했는데 잘 하지 못해 힘들다. 큰 논문을 발표해야 하는 데 가족과 학생들에게 미안하다는 유서가 발견되었고, 이 부사장의 경우도 “업무가 너무 많아 힘들다는 내용의 유서가 있었다고 한다.
한국에서 남편이 기초과학 분야 교수로 일하는 친구의 말을 들어보면 “연구 제대로 하는 교수 되려면 중노동도 그런 중노동이 없다 밤낮없이 연구실에서 살아야 연구 성과가 나오고, 그래야 연구비를 따낼 수 있다. 연구비를 못 따내면 연구를 진행할 수 없으니 자연스럽게 도태되고 만다는 것이다.
성공가도를 달려온 사람일수록 선두를 빼앗기고 밀려나는 데 대한 두려움이 큰데, 이공계열 종사자들은 그런 스트레스를 소화해내는 데 특히 약한 측면이 있다. 원자력공학 분야에 오래 종사해온 한 엔지니어의 말이다.
“고지식하거든요. 1 더하기 1이 2가 아니면 밤잠을 못자는 사람들입니다. 자동차를 살 때 보아도 다른 분야 사람들은 이거 사야지 하고 갔다가도 세일즈맨들 말 듣다보면 다른 걸 사지요. 이공계 사람들은 꼼꼼히 조사하고 마음 정하고 나면 꼭 그걸 삽니다. 융통성이 없지요
두 과학자의 자살은 그들이 ‘남성’이며 ‘중년’인 사실과 무관하지 않다. 여성이 남성에 비해 오래 사는 원인 중 하나는 감정 발산을 잘 하기 때문이라고 한다. 수다와 눈물이다. 속상하고 가슴 답답할 때 여성들은 누군가에게 털어놓고 펑펑 울기도 하는 데 반해 남성들은 속으로 꾹꾹 눌러 두는 경향이 있다.
내부압력이 극한에 달하면 압력밥솥 터지듯 터져 버릴 수가 있다.
‘중년’은 남성들이 정신적, 육체적, 사회적으로 위축되는 시기이다. 갱년기 호르몬 변화로 괜히 우울해지고, 체력이 전 같지 않아서 아들과 테니스를 쳐도 진다. 직장에서는 총기 넘치는 후배들이 쑥쑥 치고 올라와 뒷전으로 밀려나니 평생 낙천적이던 사람들도 인생 허망하다 싶어진다.
자살 가능성이 가장 높은 요인으로 ‘45세 이상의 나이’와 ‘남성’이 꼽힌다는 사실은 의미가 있다. 여기에 우울증 기질까지 겹치면 ‘죽도록 힘든 상황’이 ‘죽음’으로 직결될 수가 있다. 이번에 자살한 과학자들도 우울증 병력이 있었다.
중년은 인생의 최고봉에서 내려오는 시기이다. 오랜 ‘산정’생활을 접고 ‘비탈’로 내려와야 한다.
경사 가파른 비탈에는 비탈의 생존양식이 있다. 산정에서처럼 혼자 잘난듯 살기는 어렵다. 비스듬히 옆 사람과 서로 기대며 보듬어 주는 삶이 되어야 한다. 그래서 중년에는 배우자와 사이좋은 사람이 가장 행복한 사람이다.
권정희 / 논설위원
junghkwon@koreatime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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