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마음 속에는 접고 또 접은 아주 작은 쪽지 한 장이 끼워져 있다. 아주 어렸을 적에 끼워 놓았던 것이다. 이제 그 쪽지는 색이 누렇게 변했고 가장자리에는 보푸라기가 일어나 있다. 미세한 보푸라기의 나풀거림에 그 아이의 오동통한 얼굴과 유난히 큰 눈이 다가온다. 언젠가 함께 소꿉놀이하던 그 바위에서 그 아이를 꼭 한번 만나고 싶다는 소망을 사십여 년 동안 안고 살아왔다.
나와 그 아이는 아마도 같은 계절에 태어났는지도 모른다. 똑같이 하얀 손수건을 왼쪽 가슴에 달고 엄마 손을 잡고 초등학교에 입학했으니까. 나의 기억 속에 잠들어 있는 그 아이와의 추억은 동네 어귀의 야트막한 언덕에 자리하고 있던 넙적하고 반질반질한 바위에서의 상차림부터다. 나는 지난밤에 먹었던 꼬막과 조개껍질들을 바위에 펼쳐 놓고 풀을 뜯어 반찬을 만들고 들꽃으로 예쁜 상차림을 만들었다. 그러면 그 아이는 고기가 없다며 풍뎅이도 잡아오고 여치도 잡아왔다.
또 그 아이를 생각하면 작은 동우(이)감이 떠오른다. 작은 동우(이)감은 대봉감과 똑같이 생겼지만 모양이 아주 작았다. 내가 살던 동네에서는 대봉감을 동우(이)감이라고 불렀다. 그 아이의 집과 우리 집은 동네 길을 사이에 두고 우리 집은 높은 쪽에 그 아이의 집은 낮은 쪽에 위치해 있었다. 우리 집 문밖을 나오면 제일 먼저 눈에 띄는 게 그 동우감나무였다. 그 아이의 집 담벼락에는 작은 동우감나무가 딱 버티고 서 있었다. 늦가을에 감나무가 옷을 벗기 시작하면 감들은 부끄러움으로 벌개진 몸을 움츠렸다. 그러나 계절이 깊어 갈수록 수줍음을 벗고 자연과 함께 동화되면서 당당해지는 감들은 참으로 매혹적이었다. 담벼락 너머로 휘어진 가지에 매달린 달콤한 동우감은 온 동네 아이들의 시선을 사로잡았지만, 그 아이는 오직 나에게만 그 감을 따먹도록 허락했다. 난 그 아이의 배려로 서리 맞은 마지막 홍시의 맛도 볼 수 있었다.
초등학교에 입학을 하면서부터는 매일 등하교를 함께 했다. 고개를 넘고 다른 동네를 지나쳐야 나오는 학교를 오가는 길은 즐거움의 연속이었다. 여름이면 저수지의 수문에서 물과 함께 흘러나오는 새끼 붕어를 잡는 재미에 빠져 해가 지는 줄 몰랐다. 운이 좋은 날이면 새끼 장어까지 외출을 나와 우리의 종아리를 간지럽혔다. 그렇게 놀이에 빠져 있다 보면 허기가 몰려 왔다. 그럴 때면 그 아이는 동네 어귀에 있는 어느 집 밭 귀퉁이를 팠다. 그건 아침 등교 길에 고구마를 묻어 두었던 자리였다. 흙이 묻어 있는 고구마를 밭둑에 나 있는 풀에 쓱쓱 문질러 나에게 건네곤 했다.
지금은 그도 나처럼 평생 반려자를 만나 풀 대신에 나물을, 들꽃 대신에 화원에서 사 온 한 아름의 꽃이 꽂아져 있는 저녁상을 대하리라 생각하면서, 언젠가는 만나 그 옛날 재미난 추억을 함께 더듬으며 하고 싶은 말이 있었다.
지난 해 어린 나이에 떠나 온 고향 마을을 잠시 찾아갔다. 대낮이었건만 동네는 사람의 그림자도 어린 아이들의 소리도 들리지 않고 괴괴하기만 했다. 어린 시절 추억이 담겨 있던 집 앞에서 그 아이의 집 담벼락을 바라보았다. 그 감나무는 사라지고 없었지만 돌담은 그대로 있었다. 두근거리는 가슴을 여미며 그 집 대문 안을 살며시 들여다보았다. 집은 예전처럼 깨끗하게 관리가 되어 있었지만 아무도 보이지 않았다. 사진 한 컷을 찍고 돌아섰다. 그 아이도 동네의 다른 젊은이들처럼 어느 도시에서 살고 있으리라 생각하면서...
그리고 며칠 후 가족 모임에 참석했다. 우연히 동갑내기 외사촌과 이야기를 나누던 중에 그 아이가 화두에 올랐다. 너무나 반가워 그 아이의 전화번호를 물었다. 드디어 그 아이를 만날 수 있겠다는 기쁨에 가슴까지 두근거렸다. 어떻게 변했을까. 그는 고기 한 근을 사들고 집에 돌아오면서 풍뎅이와 여치를 잡던 추억의 끈을 아직도 잡고 있을까. 나는 가방에 있던 수첩을 꺼내들고 외사촌의 눈을 바라보며 그 아이의 연락처를 재촉했다. 순간, 외사촌의 눈에 갈등의 빛이 스쳤다. 난 그 아이가 혹시 불행한 삶을 살고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 때 외사촌은 뭔가 다짐을 한 듯 입을 열었다.
“근디, 갸가 암으로 세상을 떠났다. 2년쯤 되었지 아마.”
“…….”
나는 그 감나무가 서 있던 담벼락이 와크르르 무너지는 소리를 들으며 사십여 년 동안 묻어 두었던 말을 중얼거렸다.
“나도 니를 좋아했었는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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