겨울이면 쩡쩡, 저수지 어는 소리가 들려왔다. 어는 건 저수지뿐이 아니었다. 안채와 작은채사이의 작두샘은 아침마다 뜨거운 물 한바가지를 들이켜고서야 물을 내놓았다. 세수하면 얼던 머리칼, 손에 쩍쩍 달라붙던 쇠문고리, 빨래줄의 빨래, 마루 위의 걸레, 그 옆의 놋요강, 웃목의 숭늉사발, 흰떡가래 빠져 있던 물두멍, 아껴 두었던 살강 위의 달걀 두개, 행주질 쳐낸 밥상 위에도 돌아서기 바쁘게 살얼음이 얼어 동치미 사발이 미끄럼치며 돌아다니기 일쑤였다.
아궁이 앞에 덥혀 놓았던 신발을 신고 학교에 갔다. 고무 탄 내를 풍기며 신발에 배어 있던 아궁이의 온기는 까치홍시를 몇개 매달고 있는 명순이네 감나무 밑을 지나기도 전에 식어 버렸다. 명순이네는 딸이 여덟이었다. 첫찌, 두찌, 여섯찌, 일곱찌, 명순이 엄마는 아이들의 이름 대신 번호를 불렀다. 다섯찌였던가 여섯찌였던가 다음으로 아들을 하나 낳았었지만 고추 자르던 가위로 탯줄을 잘못 자르는 바람에 파상풍으로 아까운 아이를 잃고 말았다. 명순이 아버지가 빨간 고추를 끼워 만든 사립간의 금줄은 일주일도 못되어 내려졌다. 작은 허리를 고부려 부엌바닥에 밥상을 내다놓고 학교에 같이 갈 동생의 머리를 빗겨주는 명순이, 동생 몫까지 두개의 책보를 깡똥하게 묶어매는 명순이는 나이보다 두어살은 의젓해 보였다. 학교에서 옥수수빵을 나눠주는 날에도 명순이는 그 빵을 손도 대지 않은 채 책보에 돌돌 말아 허리에 매고 집에서 기다리는 동생들에게 달음박질쳤다.
헝겊으로 포장을 친 딸딸이 삼륜차, 옥수수빵을 가득 실은 빵차가 운동장을 가로지른다. 탁탁탁, 막대기로 교탁을 치시는 선생님, 하지만 아이들의 시선은 자꾸 빵차를 쫓아 외로 꼬였다. 절대빈곤의 나라에 처음으로 공급되던 건 가루우유였다. 아이들은 푸댓종이며 시험지 혹은 책보를 내밀어 우유를 타갔다. 입 천장에 들러붙으며 가끔 배탈을 일으키기도 했던 가루우유 다음으로 공급되던 것은 옥수수죽이었다. 학교의 우물가에 솥단지를 내걸고 죽을 쑤어 가난한 아이들 중에서도 더 가난한 아이들을 골라 먹였다. 아침 등교길에 장작개비 하나씩을 들고 오는 아이들은 그 노르스름하고 고소한 옥수수죽을 타먹을 수 있는 아이들이었다. 옥수수죽은 다시 옥수수빵으로 변하고 읍내에 빵공장이 생겼다. 교탁 옆에 타다 놓은 빵가구에서 나던 구수한 빵냄새는 우리들의 허기에 달라붙어 남은 수업을 방해하곤 했다.
겨울이면 밤새워 우둑우둑 뒷산 나무들의 우듬지를 꺾으며 내리는 눈도 무섭지 않고 누구네 논두렁인지 구분 못하게 내리던 폭설도 눈 녹으면 제 임자를 찾기 마련인데 빵차가 올라올 싸릿재에 내리는 눈발은 무서웠다. 희끗하니 잔설만 내려도 벌벌거리며 고개를 넘지 못해 읍내로 돌아가던 빵차의 빠꾸, 세상을 사는 일이 숱한 아쉬움을 품는 일이라는 걸 아직 알지 못하던 우리들에게 빵차의 빠꾸가 남긴 아쉬움은 겨울운동장의 두어 배도 더 되었다.
긴 겨울방학이 끝나면 졸업식이 다가왔다. 졸업식 며칠 전에는 사은회라는 걸 열었다. 소사아저씨와 학부모들이 모여 돼지고기를 삶고 말가웃도 넘게 모은 찹쌀로 인절미도 만들고 가마솥뚜껑 엎어놓고 부채처럼 생긴 솔잎 모갱이에 들기름을 적셔 부침개도 부쳤다. 학부형이 권하는 막걸리 한사발에 얼굴이 불콰해진 선생님은 우리들을 향해 졸업은 끝이 아니고 시작이라는 말씀이 길으시고 우리들은 인절미를 꼭꼭 씹어 먹으며 그 말씀을 경청했다. 좀 늦더라도 중학교 졸업장은 꼭 따놓으라며 도시의 공장으로 떠나야 할 가난한 아이의 어깨를 만지시며 인절미를 몇개 더 주시는 선생님, 그렁그렁하던 아이의 눈물이 툼벙, 무릎으로 떨어지고 만다.
강당이 따로 없었던 학교, 교실 두칸을 터서 졸업식장을 만들었다. 교탁 위에 책상보를 깔고 대나무가지와 버들가지 꽂은 화병을 올려 놓고 진행되던 조촐한 졸업식. 졸업식의 하이라이트는 송사와 답사가 끝난 다음 부르는 졸업식 노래였다. “빛나는 졸업장을 타신 언니께 꽃다발을 한아름 선사합니다. 물려받은 책으로-” 조붓조붓한 의자에 앉아 기다리던 재학생들이 먼저 1절을 선창한 뒤 2절은 졸업생들이 부른다. “잘있거라 아우들아 정든 교실아, 선생님 저희들은 물러갑니다-” 노래의 중간 소절을 부를 때쯤이면 노랫소리는 들리지 않고 풍금소리만 흐르게 된다.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시작한 눈물, 소매 끝으로 찍어내고 손바닥으로 닦아내도 눈물은 그칠 줄을 몰랐다.
졸업장을 돌돌 말아쥐고 들판의 갈랫길에서 헤어진 친구들, 무섭기만 하던 선생님의 눈에서 훔쳐본 눈물, 운동장을 가로지르며 뒤돌아본 정들었던 교실, 산다는 게 누군가를 떠나보내고 혹은 누군가를 떠나오는 것이라는 걸 미처 깨닫기 전의 나이, 가슴에 첫 졸업장을 안고 타박타박 걸어오던 그 들판길에서 까닭모를 서러움을 만났던 기억이 이월의 근처가 되면 생각이 난다. 해마다 이맘때가 되면 학교마다 졸업식을 하고 졸업식 노래도 부르겠지만 요즘 졸업식에는 우는 아이들도 없고 선생은 있으나 스승은 없고 학생은 있으나 제자는 없다는 씁쓸한 이야기가 회자되고 있다.
서울로 떠난 명순이는 시내버스 차장이 되었다고 했다. 그뒤로 버스의 옆구리를 탕탕 치며 “오라이”를 외치기도 하고 꾸역꾸역 사람들을 밀어넣으며 버스 문밖에 아슬아슬, 다음 정거장까지 매달려 가기도 하는 시내버스 안내양을 보면 명순이 생각이 났다. 낯선 도시에 적응하며 마음이 먹먹해질 때도 그 도시 어디에선가 고단하게 살아가고 있을 명순이가 생각났다. 운동장에 책걸상 내다놓고, 앉고 서서 찍은 흑백 졸업사진 속에 희미하게 웃고 있던 명순이, 가난했던 우리나라를 끌고 간 건 정치인도 아닌, 지식인도 아닌 바로 내 친구 명순이같은 사람들이었는지도 모른다.
졸업식 노래처럼 “앞에서 끌어주고 뒤에서 밀며” 일으켜온 우리나라는 전세계 22개국인 원조공여국의 대열에 올라섰다. 진흙과자를 먹는 배고픈 아이티의 아이들은 바로 반세기 전 절대빈곤의 나라에 살던 우리들의 얼굴이다. 배고픈 설움은 배고파 보았던 사람만이 아는 법, 평화의 본디 뜻은 밥을 나눠 먹는다는 의미라고 한다.
이젠 우리가 밥을 나눠야 할 차례이다. 굳어 있던 가루우유를 타기 위해 내밀던 푸댓종이의 기억, 빵차를 향했던 간절한 기다림을 기억해보며 배고픈 그들을 향해 우리가 다가가야 할 차례이다. 그들이 잊혀진 뉴스가 되기 전에, 오늘 하루의 해가 처마 없는 그들의 밤으로 넘어가기 전에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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