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500년 전 쯤 중국에서 구슬은 귀한 물건이었을 것이다. 그 시대의 시들을 모은 책인 시경 소아편에서 ‘농장지경(弄璋之慶)’이라는 말이 유래했다. 직역하면 구슬을 가지고 노는 경사, 아들을 얻은 기쁨을 의미한다.
당시 중국인들은 아들이 태어나면 침상에 누이고 예쁜 옷을 입히고 손에는 구슬을 쥐어주는 풍습이 있었다고 한다. 물론 떠들썩한 잔치가 이어졌다.
반면 딸이 태어나면 포대기에 둘러 맨바닥에 누이고 손에 실패를 쥐어주었다고 한다. 실패를 가지고 노는 기쁨, ‘농와지희(弄瓦之喜)’이다. 딸을 낳은 기쁨으로 풀이된다. 농경문화권의 집안에는 여자들이 길쌈할 때 쓰는 실패가 흔했을 것이고, 딸이 태어나면 실패 하나 쥐어주고 ‘나쁠 것도 좋을 것도 없다’며 덤덤하게 넘어갔다고 한다.
수천년이 지나도록 도무지 변하지 않은 것 중의 하나가 남아선호 사상이었다. 아들과 딸의 출생을 맞는 풍경이 춘추시대 중국이나 불과 몇십년 전 한국이나 그다지 다르지 않다.
한국에서 깊고도 깊었던 남아선호 사상이 마침내 막을 내리고 있다. 20세기 여권운동의 기세가 21세기 한국에서 남아선호 전통을 무너트리고 있다. 여성의 사회진출과 함께 변화한 의식과 가치관 앞에서 남아선호 관념이 퇴색했다.
지난 12일 한국의 육아정책연구소는 한국사회에서 아들보다 딸을 선호하는 경향이 있다는 발표를 했다. 연구소가 지난 2008년 태어난 신생아 2,078명의 부모를 대상으로 실시한 설문조사 결과이다. 이 조사에서 태중의 아기가 딸이기를 바란 아버지는 37.4%, 아들이기를 바란 경우는 28.6%였다. 어머니 중에서는 딸을 바란 경우가 37.9%, 아들을 바란 경우는 31.3%. 나머지는 딸이건 아들이건 상관이 없다는 입장이었다.
20-30대인 이들 보다 한 세대 전 한국에서는 낙태가 흔했다. 태아의 성별을 조사해 딸이면 낙태시켜버리는 일이 너무 잦아서 죄책감도 없었다. 그보다 또 한세대 전에는 자녀가 예닐곱씩 되는 다산가정이 흔했다. 대개 아들 하나 얻기 위해 낳고 또 낳기를 계속한 딸부자 집들이었다.
‘낙태’도 ‘다산’도 뿌리는 같다. 남아선호였다. 장자를 중심으로 가계가 계승되고 재산이 상속되는 가부장 사회에서 딸은 이등시민, “반은 적고 하나는 너무 많은” 존재였다. 아들을 낳아야 아내로서 며느리로서 지위가 확고해지니 여성들이 더 나서서 아들을 원하는 아이러니가 불과 얼마 전까지의 우리 현실이었다.
그런데 왜 갑자기 딸들의 인기가 높아진 걸까? 이 내용을 보도한 TV 뉴스에서 어느 할머니가 한 말이 인상적이었다. “딸을 선호하게 된 이유가 무엇이라고 생각하느냐는 기자의 질문에 할머니는 말했다 - “아들은 결혼하고 나면 그만이거든
’출가외인’은 이제 딸이 아니라 아들이라는 사실을 노인들이 피부로 느낀 결과이다. 결혼해 자기 가정을 갖고도 세세하게 부모 마음 헤아리고 챙기는 것은 딸이기 때문이다.
기본적으로 자녀를 보는 시각이 바뀌었다. 자녀는 두 가지 가치를 갖는다. 대를 잇고 노후의 자신을 돌볼 존재로서의 도구적 가치, 그리고 기쁨과 사랑의 대상이 되고 가족의 화목을 더해주는 정서적 가치이다. 전통적 가부장 사회에서 자녀는 도구적 가치의 비중이 컸던 반면 지금 부모들은 정서적 가치에 의미를 둔다. 도구적 가치의 개념은 별로 없다.
우리 신문사에는 지난 2-3년 사이 아빠가 된 후배 기자들이 여럿 있다. 태어난 아기들이 약속이나 한 듯 모두 딸이다. 달라진 것은 “첫딸은 살림 밑천 “다음에 아들 낳으면 되지 식의 ‘위로’가 없다는 것이다. 특히 한 후배는 결혼하면서 “무조건 딸!을 원했다고 했다. 이유는 간단하다. 딸이 예쁘니까
한인타운에서 번역·공증 업무를 30여년 해온 분이 있다. 그분이 몇 달 전 신문사를 찾아와서 새롭게 바뀐 결혼신고서를 보여주었다. 으레 신랑이 가구의 대표로 신고서 맨 위에 들어가던 것이 이제는 신랑·신부 중 누구라도 집안의 대표가 될 수 있도록 서식이 바뀌었다는 것이다. 아울러 신부가 신랑의 성을 따르던 데서 이제는 신랑이 신부의 성을 따를 수도 있게 바뀌었다.
“얼마 전 결혼신고를 한 부부는 남편이 위씨고 부인이 이씨였습니다. 남편이 자기 성 위씨가 싫다며 부인 성으로 바꿀까 하더군요
세상이 바뀌고 있다. 아들딸 선호의 문제를 넘어 부계혈통 계승의 전통도 흔들릴 수가 있다.
권정희 논설위원
junghkwon@koreatime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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