UC 어바인의 제임스 맥거그 박사는 기억력 연구의 권위자이다. 그가 2000년부터 집중적으로 연구하는 대상이 있다. 학계에 A.J.로 발표된 40대 중반의 이 여성은 기억력이 너무 비상한 것이 특징이다.
이 여성은 10살쯤부터 지금까지의 일을 기록영화 찍어놓은 듯 생생하게 기억한다. 예를 들어 ‘1977년 8월16일’ 하면 그날의 날씨부터, 무슨 요일이며, 개인적으로 어떤 일이 있었고, 중요한 뉴스는 무엇이었는지를 다 안다. 참고로 그날은 엘비스 프레슬리가 죽은 날이었다.
맥거그 박사는 다른 교수들과 팀을 이뤄 A.J.에 대한 연구를 계속하고 있지만 아직 그 비정상적인 기억력의 정체를 밝혀내지 못하고 있다. 연구팀은 이런 케이스에 대해 ‘과잉기억 증후군’이라는 이름을 붙였다.
깜빡깜빡 건망증이 고민인 중장년층에게는 이런 기억력이 부러움의 대상이 될 수도 있겠다. 하지만 정작 이 여성은 과도한 기억력 때문에 삶이 고달프다고 한다. 어떤 계기로 과거의 어느 순간이 떠오르면 이후의 모든 날들이 줄줄이 떠오르고, 10년 전 실수한 것이 여전히 생생해서 스스로 용서가 되지 않는다고 한다. 마음 편할 날이 없다는 것이다.
단 5분만이라도 평범한 사람이 되어서 머릿속에 든 이 모든 것들로부터 자유롭고 싶다고 그는 말했다. 지워지지 않는 기억력은 짐이라고 했다.
적당한 망각은 생존의 방편이다. 그런데 건망증 심한 우리 보통 사람들 역시 잊어버리지 못해서 삶이 힘든 경우가 종종 있다. 머리에 저장된 기억은 술술 빠져나가지만 가슴에 새겨진 기억은 좀처럼 빠져나가지를 않는다. 가슴에 한으로 맺힌 경험들, 응어리로 남은 기억들이다.
만델라의 집권 초기를 그린 영화 ‘인빅투스’를 보면 그가 대통령으로 일을 시작하면서 제일먼저 한 주문이 ‘잊어버리라’는 것이었다.
남아공 최초의 평등선거로 그가 대통령에 선출되기는 했지만 백인들은 코웃음 치고, 암살 위험은 어느 때보다 높았다. 대통령 집무실로 그가 첫 출근한 날 흑인들은 점령군처럼 들어서고 백인들은 짐을 쌌다. 백인에 대한 증오가 깊은 흑인 직원들은 ‘흑인천하’를 기대했고, 기존의 백인 직원들은 보복을 두려워하며 책상을 비웠다.
만델라는 양측 모두에게 ‘잊어버리라’고 말했다. 흑인 직원들은 ‘과거를 잊고 용서할 것’을, 백인 직원들은 ‘과거를 잊고 두려워하지 말 것’을 강조했다. 과거에 묶여있으면 나라가 앞으로 나아갈 수가 없다고 말했다.
남아프리카 공화국은 10% 남짓한 백인이 90%의 흑인을 착취하며 부와 권력을 독점했던 나라였다. 인종분리정책인 아파르트헤이트를 법으로 시행하면서 흑인단체들의 반대투쟁을 무자비하게 탄압했다. 1990년 흑인단체와 교회들의 저항으로 마침내 인종분리정책이 폐지되기까지 흑인들은 대대손손 고통의 역사를 살았다.
1994년 대통령에 선출된 만델라는 그러나 백인을 껴안지 않고는 나라가 지탱될 수 없다는 사실을 알았다. 그는 용서와 화해의 정책을 택했다. 과거를 과감하게 덮음으로써 그는 흑백연합정부로서 남아공의 미래를 열 수가 있었다.
새해는 새 출발의 기점인데, 새 출발이 쉽지 않은 사람들이 있다. 쇳덩이처럼 무거운 기억이 가슴을 짓누르고 있는 사람들이다. 불경기가 많은 사람들의 가슴에 한을 남겼다. 재산이 반 토막 나고, 집이 넘어가고, 직장에서 잘리고, 빌려준 돈을 떼이고 … 갖가지 불운한 사건들이 있었는데 특히 그 과정에서 누군가로 인해 해를 입었다고 생각되면 분노와 울분을 삭이기가 힘들다.
구약의 요셉은 고난과 불운을 이긴 입지전적 인물이다. 형들이 어린 그를 상인들에게 팔아넘겨 낯선 땅 이집트에서 종이 되고 억울한 옥살이까지 하지만 결국 이집트의 총리로 우뚝 선다.
그에게는 아들이 둘 있었다. 그는 아들들에게 므낫세와 에브라임이라는 이름을 지어줬다. 므낫세는 ‘과거의 모든 고난을 잊음’ 에브라임은 ‘번영을 이룸’이라는 뜻을 가지고 있다. ‘므낫세’가 있고나서 ‘에브라임’이 가능했던 자신의 삶의 철학을 요셉은 아들들의 이름으로 표현했다.
새로운 출발을 위해서는 먼저 할 일이 있다. 지난 일을 훌훌 털어버리는 것이다. 울분과 응어리가 가슴에 똬리를 틀고 있으면 삶이 과거에 발목 잡혀 앞으로 나아갈 수가 없다. 잊음으로써 번영에 이르는 비밀을 우리 모두 배워야 하겠다.
권정희 / 논설위원
junghkwon@koreatimes.com
댓글 안에 당신의 성숙함도 담아 주세요.
'오늘의 한마디'는 기사에 대하여 자신의 생각을 말하고 남의 생각을 들으며 서로 다양한 의견을 나누는 공간입니다. 그러나 간혹 불건전한 내용을 올리시는 분들이 계셔서 건전한 인터넷문화 정착을 위해 아래와 같은 운영원칙을 적용합니다.
자체 모니터링을 통해 아래에 해당하는 내용이 포함된 댓글이 발견되면 예고없이 삭제 조치를 하겠습니다.
불건전한 댓글을 올리거나, 이름에 비속어 및 상대방의 불쾌감을 주는 단어를 사용, 유명인 또는 특정 일반인을 사칭하는 경우 이용에 대한 차단 제재를 받을 수 있습니다. 차단될 경우, 일주일간 댓글을 달수 없게 됩니다.
명예훼손, 개인정보 유출, 욕설 등 법률에 위반되는 댓글은 관계 법령에 의거 민형사상 처벌을 받을 수 있으니 이용에 주의를 부탁드립니다.
Close
x