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지근한 해가 기척도 없이 사라지는 겨울 하루는 짧다. 과학적으로 하루의 길이는 아주 조금씩 길어지고 있다는데 나의 하루는 자꾸 빨라지고 있는 느낌이다. 1초의 세상에 대해 읽은 적이 있다. 하루의 최소 단위인 째깍, 간단없이 스쳐가는 그 1초의 세상에서는 지금도 두 명의 아기가 태어나며 한대의 자동차가 만들어지고 있다고 한다. 배고픈 두꺼비가 지렁이를 통째로 나꿔채는 시간이며 동시에 쏟아지는 빗방울을 피하기 위한 달팽이가 1센티의 전력질주를 하는 시간, 꿀벌은 오늘도 생존을 위해 1초에 이백 번이나 되는 날갯짓을 했을 것이다.
겨울방학이 되어 돌아온 아이들은 비어 있던 제 방들을 차지했고, 나는 불이 켜져 있거나 혹은 늦도록 불을 켜지 않는 아이들의 방을 기웃거리며 겨울밤을 뒤척이기 시작했다. 새해맞이로 소란스럽고 들쭉날쭉하던 아이들의 귀가가 제풀에 지쳤는지 오늘밤은 아이들 방의 불빛이 풀랑거리지 않고 있다. 대신 음악소리가 문 밑으로 새어나온다. 기숙사 사감처럼 자다 깨어 인원점검을 하고 돌아서며 듣는 아홉 소녀 걸그룹의 노래가 몽환적이다. 몽환적인 사운드, 몽환적인 목소리, 몽환적인 노랫말 “소원을 말해봐. 니 맘속에 있는 작은 꿈을 말해봐, 소원을 말해봐, 내게만 말해봐봐봐봐….”
가뭇없이 기울어버린 겨울 하루, 한발 도망쳤던 잠이 좀처럼 불러들여지지 않고 잡힐 듯 잡히지 않는 잠 대신에 소원을 말해보라던 소녀들의 노랫말들이 귀를 간지른다. 어릴 적 읽은 알라딘의 요술램프에서 튀어나오던 신비한 능력의 “지니”. 시도 때도 없이 주인이 부르면 나타나던 덩치 큰 지니는 동화 속에 살고 있는 소원의 상징이었다. 소원, 내가 제일 먼저 접한 소원이란 단어는 우리의 소원은 통일, 꿈에도 소원은 통일이라는 노래에서였던 것 같다. 뜻도 모르는 국민교육헌장을 달달 외워야 했던 시절, 희미하기만 하던 소원이란 단어의 뜻을 명확히 가르쳐준 건 학교가 아니라 십원짜리 카스테라였다. 한입 베어 물면 사르르 녹아들던 카스테라, 처음 맛본 카스테라의 부드러움, 그 달콤함, 그리고 아쉬움…. 그 카스테라를 실컥 먹어보는 것, 상상만으로도 꼴깍하는 소리가 들리도록 간절한 그것이 바로 소원이라는 것을 카스테라가 가르쳐줬다.
나는 그 카스테라를 사기 위해 무서운 아버지께 거짓말을 한 적이 있다. 다 쓰지도 않은 공책을 산다고 십 원을 타내는 거짓말이었다. 공책과 노트가 같은 말인 줄은 꿈에도 모르는 어머니를 속여 하루는 공책 산다고 또 하루는 노트를 산다며 이십 원을 타내 크림빵을 사먹던 중학교 때 내 친구 명심이보단 한수 낮은 거짓말이었지만 내 최초의 거짓말은 잠깐의 두려움 뒤에 한나절도 넘는 달콤함과 사십년이 지났어도 잊혀지지 않는 추억을 남겼다. 벗겨낸 동그란 종이에도 묻어있는 촉촉한 카스테라를 앞니로 떼어먹은 뒤 왼손에 가득 쥐고 있는 폭신한 행복을 오른손의 엄지와 검지로 조금씩 아끼며 잘라내 야금야금 베어 물던 그 달콤함의 기억을 어찌 잊을까.
하얀 쌀밥을 매일 먹는 것, 엎드린 동생의 등을 밟고 선 나의 키가 장롱 위 원기소병에 닿을 때까지 자라는 것, 국수를 섞지 말고 오글오글 노란 삼양라면만 끓여먹기, 꽃무늬 원피스, 오공오털실로 짠 스웨터 그만 입기, 열두 권짜리 세계아동문학전집, 송창식의 투게더아이스크림처럼 단란한 우리집, 나 혼자만의 방을 가져보는 것, 180원짜리 삼중당문고를 모조리 사모으는 것, 서울에 가보는 것, 근사한 사무실에 취직하는 것, 연탄불이 꺼지지 앉는 것, 열세평짜리 아파트 불빛 속에 갇혀보는 것…. 카스테라 이후에도 나의 소원은 계속되었다.
대부분의 내 소원은 내 최초의 소원이었던 카스테라처럼 달콤하거나 부드러운 것들을 향한 것들이었다. 하얀 쌀밥이 그랬고 털스웨터 대신 입고 싶은 스폰지 넣은 빨간색 폴리에스텔 잠바가 그랬다. 딸깍하고 스위치를 누르면 부드러운 갓등이 뽀얗게 켜지는 나 혼자만의 방을 꿈꾸는 것이 그랬고 아이스크림이 얹혀져 있는 비엔나커피를 마시며 만난 남자가 그랬다. 항상 또박또박하기만을 강조하시던 아버지가 가지고 있지 않던 부드러움, 그 부드러움을 가진 그를 좋아하기 시작했다. 궁전다방이나 장미의 숲쯤에서 만나 하오를 보내며 마시던 커피는 향기로웠다. 처음 먹어보던 하이라이스의 따스함, 알라딘의 요술램프처럼 생긴 팟에서 하얀 김이 피어오르는 소스를 부어주던 그는 하이라이스처럼 따뜻했다. 이념과 최루탄의 대립, 책과 권력의 충돌이 잦던 시대, 시대는 거칠었지만 신춘문예를 두드리던 그의 시는 부드러웠다. 부드러움만이 모든 강한 것들을 덮을 수 있다는 그의 지론에 반해 혹은 그의 부드러움에 이끌리어 평생을 그 남자 곁에 살기로 약속을 했다. 그리고 지금 나는 가끔 그 부드러움에 불만한다. 베이커리의 너무 단 빵맛에 반론을 제기하듯 아무에게나 착하고 부드러운 남편의 심성에 딴지를 건다.
나는 다시 작고, 느리고 거친 것들을 소원한다. 이를테면 카스테라를 실컷 먹어보는 꿈을 꾸던 두 칸짜리 아늑한 초가, 뒤란 흙벽에 매달린 채 그악한 겨울바람을 견디며 말려진 무청시래기, 장작불티가 날아든 아궁이 속의 못생긴 뚝배기 같은 것을 그리워한다. 설탕의 달콤한 출현은 한 세기가 가기도 전에 무가당의 품격을 불렀고 크고 보암직한 개량종에 밀려났던 토종들이 다시 부각되고 있다. 감이 되기 전의 고욤, 배가 되기 전의 돌배, 포도가 되기 전의 머루처럼 작고 볼품없는 것들에겐 사람을 품는 따뜻한 성질이 있다. 그렇듯 사람들의 소원이란 내가 가지고 있는 것들이나 서있는 자리의 반대편을 향하는 기질을 갖고 있는 것 같다. 내일을 향한 소원이 오늘이 될 수도 있음을 깨닫는 밤, 일흔아홉 개의 별이 동시에 떨어지고 있는 바로 지금 이 시각, 세상 어느 하늘 아래선가는 그 별똥별을 보고 소원을 비는 이도 하나쯤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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