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페메로프테라(epheme-roptera)’- 이 긴 단어는 하루살이 무리의 학명이다. ‘겨우 하루의 목숨’이라는 뜻의 그리스어 이페메로스(ephemeros)에서 유래했다. 스러지는 이슬처럼 짧은 목숨으로 하루살이는 덧없음의 상징이 되어왔다.
그렇다고 하루살이가 단 하루를 사는 것은 아니다. 알과 애벌레 상태로 종류에 따라 6개월 내지 1년을 산다. 하루살이가 ‘하루’ 살이인 것은 날개 달린 성충으로서 그러하다.
하루살이의 일생일대의 하루는 초여름의 어느 날이다. 오뉴월 해질 녘이면 그 몇 시간 전에 성충이 된 하루살이들이 떼 지어 하늘로 날아오른다. 짝짓기를 위한 ‘밀월여행’이다. 한바탕의 휘황한 비행이 끝나고 나면 수컷은 그 즉시 죽고 암컷은 강물에 알을 낳은 후 죽는 것이 하루살이의 생애다.
2009년의 350 여 날들이 석양의 하루살이 떼처럼 흔적 없이 사라졌다. 새해를 맞아 365일 새 날들에 대한 기대로 부풀었던 것이 머리로는 불과 얼마 전인데 몸은 어느새 그 종착점에 서있다. 세월의 덧없음이 하루살이 못지않다.
우리는 무엇을 하며 지냈기에 1년이란 긴 세월이 자취도 없이 사라진 것일까. 정산을 해볼 필요가 있다. 매년 연방 농무부 노동 통계국은 ‘미국인 시간사용 조사’를 발표한다. 2008년도를 기준으로 한 올해 통계는 지난 6월 발표되었다.
해마다 조금씩 차이가 있고, 나이, 취업, 결혼, 자녀 등 개인적 상황에 따라 차이가 있지만 평균적 큰 그림은 비슷하다.
1년을 단위로 할 때 우리는 우선 4개월여 동안 잠을 잔다. 깨어있는 8개월 중 4-5개월은 직장 일을 하고, 나머지 3개월 정도 밥 먹고 집안일 하고 아이들 돌보고 운동하고 친구 만나고 취미생활을 한다. 그중 가장 큰 부분은 TV 시청. 6주를 TV 앞에서 보낸다. 밥 먹는 시간은 3주 정도다.
통계를 빌릴 것도 없이 각자 어제나 오늘의 일과를 짚어보면 그림이 나온다. ‘잠자고 일어나 출근하고 일하고 퇴근하고 TV 보고 잠자고 …’를 붕어빵 찍어내 듯 반복했다면 시간은 흔적을 남길 일이 별로 없다. 생명체로서 생명현상을 유지했을 뿐 시간과 엮이며 의식의 밭에 기억으로 뿌리내리는 삶의 알맹이가 부실하다. 생활에 감동이 없기 때문이다.
객관적으로 똑같은 365일을 살아도 사람마다 주관적으로 느끼는 시간의 양은 다르다. 아이들이 느끼는 365일과 노인들이 느끼는 365일은 다를 수밖에 없다. 아이의 하루는 새롭고, 신기하고, 신나는 체험들로 가득한 생생한 시간들 - 시간에 담긴 감동의 밀도가 높다. 하루하루가 그만큼의 양으로 기억에 남는다.
노인의 하루는 수십 년 해온 일을 그대로 반복하는 무덤덤한 시간들 - 눈감고도 할 수 있는 습관적 일상에 감동은 없다. 그래서 어제 혹은 그제 뭘 했나? 생각해보면 떠오르는 게 없다. 아무 것도 떠오르지 않는 시간은 존재하지 않은 시간처럼 흔적이 없다.
칼스테이트 프레스노의 사회심리학자 로버트 레빈 박사는 세계 각 문화권의 시간 문화를 오래 연구했다. 그는 과테말라 고원에 사는 케추아 인디언들의 시간 문화를 좋아한다고 했다.마야 후손인 그들은 시간의 양 보다 질을 중시한다. 하루 24시간을 쪼개 얼마나 많은 일을 해낼까 보다는 그 날에 담긴 의미를 중요시 하는 것이다.
카추아 인디언들에게 모든 날은 각자 고유한 얼굴과 본성을 지닌다. 하루하루가 신성한 이름을 갖고 있고 그 이름의 신이 그 날을 이끈다고 믿는다. 그래서 그들에게는 매일이 신생의 날이다. 동이 트고 새 날이 되면 그들은 그 날의 독특한 의미를 숙고하며 하루를 시작한다고 한다. 별 느낌 없이 습관처럼 하루하루를 사는 중년 이후 많은 사람들에게 교훈이 되는 전통이다.
미국의 현대시인 매리 올리버는 삶에 있어서 ‘경이’의 중요함을 노래했다.
생이 끝났을 때 나는 말하고 싶다./ 내 생애 동안 나는 경이로움과 결혼한 신부였다고./ 세상을 두 팔에 안은 신랑이었다고./ 단지 이 세상을 방문한 것으로/ 생을 마치지는 않으리라”<‘생이 끝났을 때’ 중에서>
단지 생명을 부지한 것으로 한해를 마친다면 너무 덧없다. 경이로운 경험들이 필요하다. 잠자고 일하고 난 나머지 시간 중에 감탄하고 놀라고 신기해하는 감동의 순간들을 만들어 보자. 그래서 내년 연말에는 우리 모두 말할 수 있었으면 한다. 지난 한해동안 나는 경이로움과 결혼한 신부였다고.
권정희 논설위원
junghkwon@koreatime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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