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기억하는 할아버지의 노래는 단 한가지였다. “갓데 구로소또 이사마시꼬 지까떼 구니오 데데까라와…” 거기까지 기억하는 가사가 내가 아는 할아버지의 노래, 그 전부이다. 암울했던 역사의 틈바구니, 일제 강점기에 태어나신 할아버지는 형님에게 모든 걸 양보하시고 학교 가는 대신 지게를 지고 들에서 평생을 사셨다. 일몰이 되어서야 들에서 돌아오시던 할아버지, 봇도랑물에 발을 씻으시고 질컥거리는 고무신소리가 먼저 대문간을 넘어서던 할아버지는 말수가 아주 적으신 분이셨다.
일밖에 모르시던 할아버지가 몇잔 술에 취기가 오르면 꼭 그 노래를 부르셨다. 취기에 낮은 할아버지의 목소리가 높아지고 왜놈들 몹쓸놈들, 천하에 몹쓸놈들, 목에 핏대를 세우시다 잠 속으로 쓰러지시며 부르시던 노래, 꿈에도 치를 떨며 미워하던 몹쓸놈들의 언어로밖에는 노래할 수 없었던 할아버지의 기막힌 아이러니, 그 노래가 승리하고 돌아오는 군인을 환영하는 일본 군가였다는 것을 안 지는 그리 오래되지 않았다. 언어마져 빼앗긴 나라의 궁벽한 시골, 2년제 소학교 수료가 전부인 할아버지께서 어디서 그 노래를 배웠는지 알 수는 없다. 어둠도 사물들과 부드럽게 화해를 시작하는 일몰의 시각에 화해할 수 없는 할아버지의 상처는 그렇게 초저녁 공기 속을 부유해 다니며 어린 내 마음을 맵싸하게 했다. 나는 아궁이 속 불땀 사위어가는 소리만이 집안의 정적을 울리는 어머니 곁에 바짝 붙어 앉아 애꿎은 부지깽이만 그어대며 할아버지가 잠들길 기다렸다.
할아버지와는 달리 사범학교를 나오시고 농업학교 교장을 지낸 큰할아버지가 몇번 찾아오셨던 적이 있었다. 큰할아버지가 방으로 들어가시고 난 다음 섬돌 위에 구두코를 돌려 가지런히 다시 놓아 주시던 할아버지, 그 섬돌 밑에 물기 묻은 검정고무신을 순하게 벗어 놓고 들어가시던 할아버지의 뒷모습이 기억난다. 섬돌을 빼앗긴 검정고무신은 입을 벌린 채 저물던 하늘을 삼키고 그 저문 하늘 가장자리로 낮게 날아들던 검은 움직임, 찌찌 쪼르 쪼르 굴뚝새의 울음소리를 들으며 괜시리 슬퍼지던 그 저녁이 생각난다.
할아버지의 삶은 콩꽃을 닮았었다. 잎사귀에 가려진 줄기 끝눈에 가녀리게 매달리던 콩꽃은 꽃이라는 말 대신 노굿이라는 표현을 쓴다. 그리고 핀다는 형용사 대신 일다라는 동사를 쓴다. 바람이 일듯 구름이 일듯 다랑이밭의 콩노굿은 일다가 간 자리마다 콩꼬투리를 남겨 놓는다. 그 콩꽃처럼 이름없는 농부로 사시던 할아버지는 콩꽃이 일기 시작하는 밭둑에서 쓰러져 다시는 돌아오시지 못할 길을 떠나셨다. 콩노굿이 일 때는 비가 많이 와줘야 콩이 실하게 드는데….. 혼잣소리 하시며 나가셨던 할아버지가 바람에 눕듯 쓰러지셨다. 쓰러지신 자리에 눌려 있던 콩줄기들은 다시 일어나 그해 가을 숱한 콩꼬투리를 맺었건만한번 쓰러지신 할아버지는 영영 일어나질 못하셨다.
초등학교 다니던 딸아이가 정체성에 작은 혼란을 겪던 시기가 있었다. 방에서도 신발을 벗지 않는 개운치 않은 미국친구들과 조금씩 멀어지면서 한반의 유일한 동양인 친구 레이까와 급격히 친해지던 무렵, 아이는 주말한국학교에서 일제강점기의 한국역사를 배우게 되었다. 아이는 나쁜 나라 일본과 좋은 친구 레이까 사이에서 다시 한번 혼란을 겪는 듯 내게 많은 질문을 했다. 아홉살짜리 아이에게 강점되었던 역사를 설명한다는 것이 쉬운 일은 아니었다. 할아버지가 빼앗겼던 언어에 대해 이야기를 해주는 대목에서 아이는 얼굴도 보지 못한 외증조할아버지가 가엾어 아임 쏘리를 연발했다.
학교행사에 피아노와 바이얼린의 듀엣을 연주하기로 되어 있던 아이들, 연습을 위해 바이얼린을 들고 온 쪽니가 귀여운 레이까가 슬그머니 주방으로 들어왔다. 쥴리마미, 아임 쏘리 아임 쏘우쏘우 쏘-리….. 울먹이는 얼굴로 사과를 하는 아이 앞에 나는 적지않이 당황이 되었다. 강점된 역사, 수탈당한 역사, 핍박의 역사를 이야기하기엔 아이는 너무 작고 맑았다. 괜찮다는 어눌한 영어 몇마디와 쿠키쟁반을 내밀어 주던 그날도 아이들은 날이 저물도록 듀엣곡을 연습했다.
오늘도 또 한차례 일몰이 든다. 일몰의 시각이면가끔 할아버지 생각이 난다. 돌아가신 뒤 아버지가 챙겨오셔 신발장 위에 올려 놓았던 할아버지 고무신이 생각난다. 질척이는 논고랑 밭고랑을 밟았을 고무신, 두엄더미를 밟고 소똥을 밟았을 고무신, 아그배꽃잎을 밟고 봇도랑물도 건넜을 할아버지의 고무신은 할아버지의 분신같은 것이었다. 시대에 순응하고 부모에 순응하며 태어나신 동네를 떠나보신 적이 없는 할아버지, 그 걸음에 걸려 있던 고무신은 행여 알고 있었을까. 두마지기 콩밭머리에 앉아 생각했을지도 모르는 할아버지의 꿈을, 싸릿고개 너머 하얀 신작로까지 들리도록 목청껏 부르고 싶었던 할아버지의 노랫말을 그 고무신은 알고 있었을까.
할아버지의 유전인자 탓일까, 나는 저물녁의 음악이 좋다. 할아버지는 한잔 술의 취기로 노래하셨지만 나는 쌉싸름한 일몰의 취기로 노래한다. 일에서 돌아오는 찻속, 일탈의 아늑함에 기대어 노래한다. 할아버지의 노래는 질컥이는 기차표검정고무신이 따라 불렀지만 나의 노래는 나뭇잎 몇장 슬픈 음계처럼 매달려있는 자작나무숲이 따라부른다. 그 숲에 새둥지처럼 노랗게 걸려 있는 겨울달도 따라 부른다. 할아버지는 노래 끝에 잠이 드셨지만 나는 노래 끝에 꿈을 꾼다. 할아버지는 남의 노랫말로 노래했지만 나는 따뜻한 나의 언어로 노래한다.
오늘은 할아버지를 닮은, 하얀 두루마기의 소리꾼 장사익의 노래를 듣는다. “하얀꽃 찔레꽃, 순박한 꽃 찔레꽃, 별처럼 슬픈 찔레꽃, 달처럼 서러운 찔레꽃, 찔레꽃 향기는 너무 슬퍼요, 그래서 울었지 밤을 새워 울었지……” 할아버지의 잃어버렸던 노래, 그 억눌렸던 정서를 생각하며 듣는 찔레꽃 노래가 슬프다. 취기로 흔들리던 빈 바지게를 내려 놓고, 가슴 속 그믐밤같던 음울한 상처를 드러내 놓고 한번쯤은 꼭 한번쯤은 불러보고 싶었을 노래를 내가 대신 부른다. 찔레꽃 노래는 내 할아버지의 꿈과 슬픔을 옮겨 적은 오래된 블루노트다. 부지깽이로 끄적이며부엌 바닥에 그 슬픈 음표를 그려보던 어렸던 손녀, 반세기를 살고 나서야 그 낮은음자리표가 숨어 있는 악보를 해독한다. 가슴 속에 동부콩알만하게 간직하고 있던 할아버지의 슬픔이 콩노굿 일듯 서러운 목청으로 일어선다. 할아버지가 못다 부른 노래를 가만가만 따라 부르는 내 가슴에 찔레꽃 향기가 눈물처럼 고인다. 콩노굿 내 할아버지, 섬돌 위 검정고무신 내 할아버지, 불운한 시대의 뒤안길로 사라지신 그 할아버지의 뒷모습에 하얀 찔레꽃이 눈 되어 내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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