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초혜 시인의 ‘만월’에 ‘달밤이면 살아온 날들이 다 그립다.’라는 구절이 있다. 살아온 날들이 어찌 절절한 그리움만을 남겨두었겠는가? 다만 과거의 영상은 아쉬움의 자락이고 인고의 캡슐이며 열망의 덫이었기에 더욱 뒤돌아 봐지는 게 아닐까?
달밤이면, 달빛 그림자에 나부끼는 내 생애의 한 모퉁이가 그리워진다. 그 시절 나의 관심은 맛있는 눈깔사탕이 전부였고, 그건 세상에서 가장 달콤한 맛이었고, 어떻게 하면 그 눈깔사탕 하나를 온전히 나 홀로 먹을 수 있을까에 골몰했었다. 귀하게 얻은 눈깔사탕 한 개를 동생들 몰래 살살 빨아먹는(너무 세게 빨면 빨리 녹아버리니까) 즐거움. 그런 즐거움도 잠시, 눈치 빠른 동생이 한번 빨아먹자고 징징거리면 할 수 없이 눈을 부라리며 (조금만 빨아먹고 달라는 압력) 나눠 먹어야만 했던 서걱서걱한 시간들.
하늘에서 한 무리가 와크르르 쏟아져 내린 듯한 많은 형제들. 그 틈바구니에서 나만의 소유란 있을 수 없었다. 불변의 원칙과도 같이 물림되는 옷과 신발. 죽을힘을 다해 바위에 빡빡 문질러 대도 닳아지지 않던 검정 타이어 고무신에 대한 좌절과 고품질에 대한 경이로움! 명절 몇 개월 전부터 별의별 꾀와 수를 부려도 명절날 아침에 나에게 돌아오고야 말던 그 불변의 원칙. 그럴 때면 선천적으로 광대뼈 없이 처진 볼은 퉁퉁 불은 입과 더불어 쌀 몇 되 담아 놓은 자루가 되곤 했다.
그러던 어느 날, 귀가 번쩍 뜨이는 소문이 동네에 흘러 다녔다. 그건 옆 동네에 예배당이라는 것이 생겼는데, 몇 달만 잘 나오면 사탕 한 봉지(!)를 준다는 것이었다! 나는 사탕 한 봉지라는 말에 사지가 찌릇거리는 흥분을 느꼈다. 난 그 예배당이라는 곳에 나가기로 결심했다. 일주일에 두 번. 그런데 꼭 밤에 가야 했다. 그도 그럴 것이 어른들은 낮에 일을 해야 했기 때문이었다.
나는 동네 처녀 총각들을 따라 달빛을 밟으며 그 예배당이라는 곳에 갔다. 예배당 건물은 자그마한 목조 건물이었지만, 온 동네가 조개껍질처럼 옴팍옴팍 엎어져 있는 초가집에 비해 예배당은 최신식 건물이었다. 그곳에서 무엇을 배웠는지는 기억이 없다. 다만 목젖이 파르르 떨리도록 노래를 불렀다는 사실이다. 흰저고리와 까만 통치마를 입은 젊은 언니가 뭔가를 열심히 가르쳤지만, 나의 관심은 오직 사탕밖에 없었다. 그 많은 사람들에게 사탕 한 봉지씩 나눠주려면 어딘가에 사탕이 산더미처럼 쌓여 있어야 하는데 도대체 보이지 않았다.
눈이나 비가 내린 날이면 신발은 진흙덩이로 무겁고 질척거렸지만 개의치 않았다. 충분히 가치가 있다는 나의 약삭빠른 계산이었다. 예배당에서 집으로 돌아오는 길 산 가장자리에는 무덤들이 즐비하게 있었다. 동네 처녀 총각들은 그 무덤들을 지나칠 때면 “귀신이다!”를 외치며 냅다 뛰기 시작했다.
나는 그 대열에서 벗어나지 않기 위해 안간힘을 썼지만, 덩치면에서 턱없이 컸던 언니의 검정 타이어 고무신은 내 발에서 늘 헐거덕거리다 벗겨지고 말았다. 벗겨진 고무신을 집어들고 뛰기란 여간 벅찬 일이 아니었다. 한 가지 묘안으로, 발과 신발을 노끈으로 칭칭 감아버리고서야 밤길을 맘 놓고 달릴 수가 있었다.
드디어 사탕 받는 날이 다가왔다. 나는 해도 떨어지기 전에 예배당으로 향했다. 얼룩덜룩한 어둠이 예배당의 뾰족한 탑을 감싸기 시작하자 예배당 안에는 발 디딜 틈도 없을 정도로 붐볐다. 평상시에는 전혀 얼굴을 내밀지 않았던 사람들도 보였다. 그 얼굴들 사이에서 난 그래도 제법 의기양양하게 버티고 있었다. 최소한 나는 몇 개월 동안 목이 쉬도록 노래를 불러줬다는 자부심 때문이었다.
모든 참석자가 부른 마지막 노래가 파삭거리는 겨울 공기를 가르며 울려 퍼진 후에야 사탕 한 봉지를 받아들고 집으로 돌아올 수 있었다.
그 사탕 한 봉지를 나만의 비밀 장소에 감춰둔 채 오랫동안 곶감 빼먹듯이 먹었다. 그 사탕을 먹는 동안 난 동네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그 예배당에 대해서 까맣게 잊어 가고 있었다. 많은 세월이 흐른 뒤, 난 그 달콤한 사탕 한 봉지의 추억을 더듬으며 새벽 종소리가 구르는 시멘트 골목길을 따라나섰다.
이성애
워싱턴 여류수필가협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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