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해 전세계인이 사용한 종이의 양은 삼천 구백만 톤으로 한 사람이 삼십년생 원목을 한그루씩 베어 쓴 셈이라고 한다. 우리는 아침에 눈을 뜨면서부터 종이의 소비로 시작하는 하루를 살고 있다. 화장지, 계란팩, 우유팩, 키친타올, 냅킨, 종이컵, 종이접시, 티백, 신문, 복사지, 전단지, 포장지…… 우리가 무심코 썼던 종이의 소비가 숲 속에서 삼십년이나 자란 나무 한그루씩을 베어먹은 셈이 되었다 하니 충격적인 이야기가 아닐 수 없다.
우리가 하얗고 질 좋은 종이를 골라 쓰고 있는 동안 산소를 토해내던 나무들이 쓰러지고 숲이 통째로 베어지고 있었던 것이다. 숲이 사라지는 지구는 온난화가 가속되고 서식지를 빼앗긴 동물들은 날로 난폭해져 인간을 공격하는 일이 잦아질 것이다. 자연과 사람 사이에 균형이 깨어지고 있다.
할머니는 비료푸대종이, 이홉드리 소주병, 장보따리 속에서 나온 기차표 검정고무신이나 낙하산양말을 싸준 푸대종이같은 것도 소중히 간수하셨다. 비료푸대종이는 새학기 책을 싸는 포장지가 되기도 했고 겨울 들판에 가오리연이 되어 날아가기도 했다. 혹은 볼일 보는 사이 손으로 비벼 뒷간종이로 사용되어졌다. 그렇게 뒷간 바닥으로 떨어진 푸대종이는 발효가 된 뒤 두엄더미에 섞여 두엄김이 오르는 봄날이 오면 논이나 밭에서 물에 풀어진 하얀 요소비료와의 해후를 했다.
할머니는 깨끗한 푸대종이를 골라내 무쇠반닫이 옆에 끼워 놓았다가 겨울의 초입에 떡종이로 쓰셨다. 몇개 안 남은 못생긴 모과가 된서리 맞으며 시고 떫은 맛을 떨어낼 때 쯤, 할머니는 다시 바빠졌다. 이홉드리 소주병에 종이마개 틀어막아 참기름을 담고 무명자루에 녹두, 팥, 서리태를 올망졸망 나누셨다. 끝으로 구멍 뚫린 질시루에 베보자기 깔아 시루떡을 찌셨다.
하얀 찹쌀가루와 쳇불 굵은 어레미에 내린 팥고물을 한켜씩 깔고 옹솥에 물을 부어 떡시루를 올리고 시룻번 붙여 장작불을 활활 지피셨다. 겨울 초입이면 그렇게 한번씩 부엌간에 떡 익는 냄새가 고소했다. 떡 익는 냄새는 겨울의 향기였다. 추수를 끝낸 할머니가 만들어내는 감사의 향기였다. 할머니는 접시 끝을 눌러 열십자 모양으로 자른 찰시루떡을 푸대종이에 싸 보따리에 얹고 도시의 자식들 집을 차례로 순례하셨다.
읍내로 이사나온 뒤 우리집에도 할머니의 그 순례가 시작되었다. 찰시루떡을 좋아하는 맏손녀땜에 한말가웃 넘게 찹쌀을 찧었다시며 나무등걸같은 손으로 풀어 놓던 떡보따리, 그 할머니가 시골집으로 돌아가시며 챙기는 것은 딱 두가지였다. 하나는 빈 보자기였고 또 하나는 시험지였다. 선생님이셨던 아버지 덕분에 언제나 우리집엔 회푸대종이보다 곱절은 부드럽게 쓸 수 있는 시험지가 넉넉했다. 가리방 긁어 롤러로 밀은 갱지시험지는 걸핏하면 잉크가 배어나왔지만 할머니에게 그 종이는 허리띠 졸라매고 가르친 맏자식에게 얻은 자부심이었다. 할머니는 그 자부심을 뒷간에 두고 오래도록 아껴 쓰셨다.
모든 게 흔치 않던 시절이었다. 어쩌다 동네에 잔치라도 치르는 일이 생기면 온동네의 접시가 모아졌다. 살강 위의 접시 한죽으로는 삼동 사람을 다 먹일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이집 저집에서 거두어온 접시들은 모양새가 비슷했다. 잔치가 끝나고 싸리채반이나 대채반 위에서 물기를 날린 접시들을 이집 저집으로 용케도 분리하던 할머니의 비밀은 접시 뒷면에 있었다. 접시를 사오면 아예 빌려줄 날을 대비하여 사람들은 접시 뒷면에 동그라미며 세모, 네모, 작대기 한개, 작대기 두개, 아직 동네에 없는 표시를 찾아내 그집만의 표시를 그려 넣었다. 일찌감치 도회로 나가 고등학교 선생님이 되셨던 작은아버지가 사오신 뼁기칠과 작은아버지의 빛나는 감성 덕분에 우리집 접시 밑에는 주홍색 반달이 떠있었다.
나는 우리집에 신문물을 들여다주던 그 작은아버지를 닮고 싶어 했었다. 다섯시에 시작되는 어린이방송을 듣게 해준 사람도 작은아버지였고 흑백텔레비젼을 사온 사람도 그 작은아버지였다. 저녁을 일찌감치 먹은 동네사람들이 연속극 여로를 보려고 할머니집으로 몰려들었다. 초저녁잠이 많은 할머니는 연속극이 아무리 재미있어도 졸음을 참지 못했다. 둘둘 걷어올린 잠벵이에 고무신 신은 장욱제가 “아부지야 놀자, 제기차기 하자” 고무신 벗겨진 채 바보웃음을 흘리면 동네사람들은 따라 웃으며 텔레비젼 속으로 빠져들고 할머니는 초저녁잠으로 빠져들었다. “그옛날 옥색댕기 바람에 나부낄때 봄나비 나래위에 꿈들을 실어보았는데…” 이미자의 주제곡이 나오면서 하루치의 이야기가 끝나면 그제서야 할머니는 초저녁 단잠에서 깨어났다. 은근히 전기세 걱정을 하면서도 사람들이 돌아갈 때까지 대문의 빗장을 지르지 않고 흐뭇하게 앉아 있던 할머니 모습, 나도 커서 할머니를 흐뭇하게 만드는 사람이 되고 싶었다.
훗날 나도 꿈꾸던 것처럼 도회지로 나가 살며 가끔 할머니를 찾아갔다. 불쑥 내밀면 신기해 하고 자랑하며 아끼고 오래 보듬을만한 선물을 준비해 보았지만 살구색 봄쉐타는 아끼느라 반닫이 속을 못벗어났고 솜누비버선을 사다 드려도 할머니의 발뒤꿈치엔 언제나 낡은 버선이 걸려 있었다. 새것은 두었다가 쓰려고 못쓰고, 좋은 것은 아꼈다가 쓰려고 못쓰고, 돌아가신 할머니 반닫이 속엔 새것과 좋은 것들만 가득했다. 일곱마지기 논문서보다 더 소중한 할머니의 마음, 아끼며 행복했고 간직하며 행복했던 할머니의 마음문서가 그 반닫이 제일 밑에 숨어 있었다.
일회용 용기의 천국인 미국에 살며 문득 할머니 생각이 날 때가 많다. 한번 쓰고 버리는 멀쩡한 종이컵과 꽃분홍색 앙증맞은 아이스크림 스푼을 보면 할머니 생각이 난다. 고급쿠키깡통이나 예쁜 선물상자를 봐도 할머니 생각이 난다. 할머니라면 버리지 않고 백날 천날을 넘겨 쓰실 텐데, 아까운 일회용품을 손에 들고 잠시 망설일 때가 있다.
추수감사절 저녁, 설겆이를 마치고 쓰레기를 들고 나간다. 하루 먹은 쓰레기통이 너무 무겁다. 옛날의 잔치는 삼동네 사람들을 다 먹이며 사나흘이나 치뤄졌지만 구정물통의 돼지먹이가 좀 톱톱했을 뿐 버려지는 게 없었는데…. 채알 걷은 마당을 비질해 나온 얼마 안되는 쓰레기도 쇠죽 쑤는 아궁이에 탁 털어 넣으면 재가 되어 다시 자연으로 돌아가면 그뿐이었는데…. 못생긴 모과나무 가지에 내려앉은 별빛이 잠든 동네를 지키던 그곳이 생각난다.
허리께까지 오는 키큰 쓰레기통을 끌어내 놓고 돌아서는 내 등 뒤로 달의 기척이 느껴져 뒤를 돌아본다. 집을 짓기 시작한 건너편 자작나무숲에 달 하나가 걸려 있다. 어릴적 우리집 접시 밑에 그려져 있던 주홍 반달을 닮은, 살 오른 달 하나가 언제 베어질지 모르는 자작나무 가지 끝에 걸려 그 옛날 할머니처럼 나를 내려다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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