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꿈을 두 가지 의미로 사용한다. 첫째는 사람이 자는 동안에 머릿속에 생겨났다가 사라지는 현상을 의미하고 둘째는 사람이 깨어있는 동안에 현실사회에서 이루고자 하는 이상을 뜻한다. “꿈같은 이야기는 하지도 마시오!” 할 때는 첫째 의미의 꿈을 말하는 것이고 “젊은이들이여, 꿈을 가지시오!” 할 때는 둘째 의미의 꿈을 말한다. 나는 젊어서부터 현실사회를 위하는 둘째 의미의 꿈에 대하여 깊은 관심을 가졌지만 잠자는 동안에 생겼다가 없어지는 첫째 의미의 꿈에 대하여 아무런 가치도 인정하지 않아왔다.
해방 후 이십대 초반에 나는 신학도가 되어 평양 시내 모 교회 전도사가 되었다. 교회에서 처음 만난 사람 중에 꿈을 꾸고 장래 일을 명확히 예언하는 권사가 있었다. 그녀가 하는 말이 자기는 내가 모 교회에 취임할 것을 미리 알았다는 것이었다. “어떻게요?” “한 달 전에 꿈속에서 후리후리한 김 전도사가 회색 두루마기를 입고 우리 교회에 나타나는 것을 보았거든요.”
그 후부터 나는 교회에서 그녀와 자리를 같이 하면 될수록 멀리 피하려고 노력했다. 가까이서 말이 되면 혹여 꿈에 관한 신학적 해석을 요구할 것이 두려웠기 때문이었다. 성경 속에 꿈에 관한 이야기가 있고 꿈 해석을 잘하고 큰일을 이룬 요셉 같은 인물이 있었기에 전도사였던 나로서 꿈을 숭상하는 권사를 무턱대고 반대할 수 없었다. 그렇다고 내게 꿈에 관한 신학적 입장이 서 있는 것도 아니었다.
꿈이란 그저 머릿속에 일시 일어났다가 없어지는 의미 없는 자연현상이라고 나는 그때에 생각했다. 꿈은 마치 하늘에 떠다니는 구름처럼, 공기를 흔들고 지나가는 바람처럼, 혹은 이른 새벽 땅 위에 잠시 앉았다가 증발해버리는 이슬처럼 육체의 상황에 따라 잠시 생겼다가 지나가는 현상이라고 나는 생각했다. 그 생각은 90이 가까워진 지금도 마찬가지다.
내가 젊어서 특별히 좋아한 꿈은 하늘을 훨훨 날아다니는 일이었다. 꿈속에 나는 종종 높은 산꼭대기에 올라서서 눈 아래 땅을 내려다보다가 두 팔을 벌리고 날개를 치며 날아다녔다. 큰 도시의 고층 건물 위로 날아다니고 작은 마을의 가로수 위로 날아다니면서 땅에 붙어 걸어 다니는 사람들을 내려다보았다. 어떤 때는 누군가가 나를 따라 뛰어오며 내 다리를 붙들려했다. 그러면 나는 독수리처럼 날개를 치며 높은 하늘로 날아갔다. 그런 꿈은 즐거운 것이었다.
나는 1947년 북한공산정권에 붙잡혀 한 달 넘게 감방생활을 하고난 뒤 몇 해 동안 악몽에 시달렸다. 다음 해에 북한 정권을 벗어나서 남한 땅에 살면서도 오랫동안 악몽은 계속 되었다. 꿈속에 어디든지 가면 누군가가 나를 붙들러 오는 것이었다. 도망치려고 애쓰다가 깨어나면 꿈이었다. 현실이 아니고 꿈이었던 것이 마음을 달래주었다. 그런 것이 꿈이었다. 시원하든지 즐겁든지 꿈은 머릿속에 잠시 나타났다가 사라져버리는 헛된 것에 지나지 않았다.
그런데 나는 나이 많아진 지금에 이르러 꿈에 관하여 새 것을 발견했다. 꿈에 대하여 새로운 의미를 찾았다는 뜻은 아니다. 꿈은 육체적인 상황에서 의미 없이 나타났다가 없어지는 헛된 것이라는 생각에는 지금도 달라진 것이 없다. 달라진 것은 꿈의 본질에 관한 것이 아니라 꿈을 꾸게 되는 현상이 외로워진 나 같은 늙은이에게 위로가 된다는 사실이다.
나는 20여 년 전에 공식으로 은퇴하고 여기저기서 십 수 년 동안 몇 가지 작은 일을 하고나서 다시 뒤로 물러난 후 지금 3년 동안 뇌졸중으로 고생하는 86세의 아내를 돌보는 일에 전념하고 있다. 내가 지금 하는 일은 아내의 시중을 들고 집안 살림을 하는 일이다. 그밖에 짬짬이 책을 읽고 글을 닦으며 나날을 보내는 것이 고작 하는 일이다.
최근에는 젊을 때처럼 6-7시간 계속하여 잠을 자는 일이 없고 밤중에 한 두 차례 혹은 서너 차례 깨어나는 일이 상사가 되었다. 그런가 하면 낮에도 종종 주저앉아서 잠시 눈을 감고 잠드는 일이 흔하게 되었다. 그러고 보니 자고 깨는 일의 차이가 혼미하게 되어 있다. 이에 따라 현실과 꿈 사이의 차별이 명료하지 않게 되었다.
그런 중에 꿈이 찾아오면 마치 반가운 손님을 맞이하는 것처럼 즐겁다. 의미 없는 것이 꿈이고 헛된 것이 꿈이지만 큰 일 없이 집안일로 고달파진 늙은이에게는 반가운 손님 같이 고마운 현상이다. 어떤 꿈은 즐겁고 어떤 것은 괴롭지만 지금은 어떤 꿈이든지 오는 것이 반가울 뿐이다.
내 경험으로 추측컨대 늙어서 은퇴하고 십여 년 지난 사람이면 누구나 공통으로 느끼는 서운함이 있을 것이다. 오랫동안 준비하여 닦은 학문과 힘들여 얻은 경험을 무료하게 썩히는데 대한 아쉬움이다. 내가 젊어서 주로 하던 일은 책을 읽고 연구하여 그 결과를 강단에서 강의하고 회중 앞에서 설교하는 일이었다. 주로 많은 사람들이 모이는 회의에서 사회를 담당하고 어려워진 문제 해결을 위한 모임을 주관하는 일이었다. 그런 기회가 없어지고 허전해진 상황에서 마음을 달래주는 것이 꿈속에 나타나는 현상이다.
어제 밤에 나타났던 꿈이 그런 것이었다. 장소는 유명 대학교의 채플이었다. 사회하는 사람이 나를 회중 앞에 장황하게 소개했다. 나는 천천히 일어서서 강단에 자리를 잡고 준비했던 강의를 힘 있게 전달했다. 회중이 일제히 일어나서 박수와 갈채로 응답해 주었다. 그런데 그것이 현실이 아니고 꿈이었다. 현실 속의 나는 병든 몸으로 괴롭게 잠든 아내를 지켜보고 있었지만 꿈속의 나는 대학 강당에서 강의를 하고 있었다.
현실이 아닌 것이 섭섭했지만 즐거움을 얻은 것은 현실이었다. 의미 없는 것이 꿈이었지만 고달프고 섭섭해진 나에게 찾아오는 꿈은 반가운 손님 같았다. 그래서 나는 꿈을 환영하게 되었다. 무의미한 꿈도 알고 보면 사랑하는 창조주께서 초개같은 인생에게 은혜로 주시는 선물 중의 하나라고 깨닫게 되었다. 그래서 나는 속으로 외친다.
“꿈이여, 오시오!”
댓글 안에 당신의 성숙함도 담아 주세요.
'오늘의 한마디'는 기사에 대하여 자신의 생각을 말하고 남의 생각을 들으며 서로 다양한 의견을 나누는 공간입니다. 그러나 간혹 불건전한 내용을 올리시는 분들이 계셔서 건전한 인터넷문화 정착을 위해 아래와 같은 운영원칙을 적용합니다.
자체 모니터링을 통해 아래에 해당하는 내용이 포함된 댓글이 발견되면 예고없이 삭제 조치를 하겠습니다.
불건전한 댓글을 올리거나, 이름에 비속어 및 상대방의 불쾌감을 주는 단어를 사용, 유명인 또는 특정 일반인을 사칭하는 경우 이용에 대한 차단 제재를 받을 수 있습니다. 차단될 경우, 일주일간 댓글을 달수 없게 됩니다.
명예훼손, 개인정보 유출, 욕설 등 법률에 위반되는 댓글은 관계 법령에 의거 민형사상 처벌을 받을 수 있으니 이용에 주의를 부탁드립니다.
Close
x