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용미( 수필가. 포토맥.MD)
내가 처음 빨아본 빨래는 마루 닦는 걸레였다. 날이 저물어 버섯같이 오그린 초가의 굴뚝에서 저녁밥 짓는 연기가 올라가기 시작하면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같이 놀던 친구들은 흩어져 집으로 돌아갔다. 이미 하얗게 비질이 되어 있는 바깥마당과 안마당을 지나 토방 위로 올라서면 마루 닦는 일이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엄하셨던 아버지께서 내 허리가 마루에 닿을 때쯤부터 내 몫의 집안일로 정해주신 일이었다.
마루를 닦고 난 뒤 더러워진 걸레를 빨아 놓는 것도 내 일이었다. 나는 찌그러진 양재기에 별처럼 구멍을 숭숭 뚫어 놓은 빨래비누그릇과 걸레를 들고 개울가로 갔다. 산에서 내려온 세 갈래의 개울물은 마을의 끝에서 만나 하나로 흘러갈 때까지 여기저기 대여섯 군데의 빨래터를 만들어 주었다. 산밑 첫개울터에선 푸성귀를 씻고 중간 개울터에서는 여느빨래를 하고 끝개울터에서는 노란 애기똥기저귀를 빨았다. 개울물은 그 모든 더러운 것들을 싣고도 아무 불평없이 돌돌돌 노래하며 흘러갔다.
개울에는 늘 먼저 와 있던 친구가 야무진 방망이 소리를 내며 걸레를 빨고 있었다. 그 친구가 개울물에서 건져낸 걸레와 토란잎이나 호박잎으로 싼 뭉개진 빨래비누를 챙겨 먼저 일어서고 나면 비탈길을 따라 내려온 개울엔 나 혼자 남겨졌다. 희끗희끗 하루살이 달개비꽃이 어린 나비같은 날개를 접는 개울 가엔 물소리만 무성하고 흘러가는 물소리 속에서 나는 처음으로 외로와지는 법을 배웠다.
뒤란 모퉁이 처마 밑에는 늘 커다란 빗물받이 항아리가 하나 놓여져 있었다. 비가 오면 빗물이넘치던 그 항아리에 볕이 들면 하늘을 흐르던 구름도 내려와 숨고 밤이 되면 가끔 별도 몇개씩 빠져 있었다. 지붕을 타고 내려온 노란 빗물은 꽁깍지나 지푸라기 혹은 메밀대 태운 재와 섞여 잿물이 되었다.
잿물로 삶아진 빨래는 잘 식지 않는 자배기로 퍼 옮겨지고 김이 펄펄 나는 그 빨래자배기는 어머니의 잰걸음과 함께 개울 가로 날라졌다. 요술처럼 물을 딛고 놀던 소금쟁이 식구들이 어머니보다 더 빠른 걸음으로 도망친 개울가, 넓적한 돌 위에 뜨거운 빨래가 올려지고 박달나무 빨래방망이 세례를 받은 빨래는 하얗게 변해갔다. 개울물에 넣고 절레절레 흔들어 북북 문지르고 다시 절레절레 흔들어 때를 빼는 아홉식구의 빨래는 겨울이 오고 개울물이 얼어붙어도 계속되었다. 어머니는 그 개울 가에서 손마디가 닳고 가락지가 닳아지도록 빨래를 하셨다. 산기슭 푸작나무 잎사귀가 흔들리도록 손방망이질을 하셨다.
장에 가셨던 할머니가 오일장 한귀퉁이에서 깡통 속에 담아 놓고 팔던 양잿물 덩어리를 사오시면서 잿물 만드는 수고는 덜어졌다. 두꺼운 종이에 싸여져 지푸라기에 묶여 온 손가락만한 하얀 양잿물 덩어리를 물 한동이에 집어 넣으면 쉽게 양잿물을 얻을 수 있었다. 양잿물은 동네에 작은 혁명을 일으켰다. 하지만 그 신기한 덩어리는 동네에 무서운 사건을 일으키기도 했다.
하늘이 밭둑까지 내려앉아 새들도 날아다니지 않던 어느 날, 동네가 술렁이기 시작했다. 말수 적던 마을 처녀가 물 한동이 대신 밥사발 하나에 독한 양잿물을 타 마시고 세상을 떠나는 일이 벌어졌기 때문이다. 그 처녀가 사랑한 대상이 누구였는지는 끝까지 비밀에 부쳐졌고 그 일이 있은 후 나는 양잿물 덩어리가 매달려 있는 굴뚝 모퉁이가 밤의 뒷간보다 더 무서워졌다.
두레박 던져 넣던 우물 자리에 작두샘이 생기고 마중물 한 바가지를 넣고 작두질을 하면 콸콸 물이 쏟아져 나왔지만 동네사람들은 여전히 흐르는 개울물로 빨래를 했다. 양잿물을 비웃듯 하이타이 하얀가루가 그 동네를 점령할 즈음 우리는 읍내로 이사를 했다. 읍내 양옥집에서 꼭지만 틀면 호스 가득 물줄기가 내려오는 수돗간을 만난 뒤 쿠르륵하고 마중물을 삼키기 일쑤였던 작두샘은 열흘도 지나지 않아 잊어버렸다. 아늑한 양옥 마당, 햇살이 쏟아지는 수돗간에서 양잿물도 아닌 하이타이 무한거품 속에서 어머니가 빨래를 하던 모습은 처음인 것처럼 아늑해 보였다.
여고생이 되면서 집을 떠나고 온전히 내 몫이 되어버린 내 빨래를 하면서 나는 조금씩 철이 들어갔다. 자취집 주인 눈치 보며 살살 틀어 쓰던 수돗물, 통통 불어 바알개지던 손 끝으로 구석진 빨래줄에 젖은 빨래를 포개 너노라면 슬며시 서러운 마음이 들곤 했다. 그 서러움의 끝에는 젖은 빨래 활활 털어 하늘 가득 널어두던 너른 우리집 앞마당과 그 빨래 사이로 왔다갔다 하던 월남치마 입은 어머니를 향한 그리움이 잦아들었다.
어쩌다 한번 자취집에 찾아오시던 어머니는 쪽마루에 보따리를 내려놓고 빨래부터 시작하셨다. 가루비누 풀어 카시미론이불까지 북북 빨아 널어 어머니가 떠나고 나신 방안엔 물내가 가득했다. 뽀얗게 삶아낸 속옷은 알전구 밑 노란 나일론줄에 걸려 말라가고 두평짜리 자취방에 꽃무늬 촌스럽던 카시미론이불을 덮고 잠을 청하노라면 어머니를 싣고 떠났던 기차가 뎅거덩거리며 다시 도시로 돌아오는 소리가 들려왔다.
세월이 개울물처럼 흘러가 내 몫으로 키운 아이들이 혼자가 되어 떠나갈 때 제일 먼저 가르친 것이 빨래를 하는 일이었다. 그리고 설은 솜씨로 첫빨래를 할 아이들을 상상하는 일만으로도 공연히 내가 먼저 서러워졌었다.
쌀뜨물로 세수하고 녹두가루로 빨래를 하던 이야기는 할머니와 함께 묻힌 전설이 된 지 오래다. 아껴 써라 아껴 써라, 벌꿀비누 이쁜이비누 살살 문질러 세수하던 아침마다 거품 묻은 귓전으로 쏟아지던 잔소리도 이제는 다시 들어볼래야 들어볼 수 없는 추억의 잔소리로 잊혀져가고 있다.
비누 거품처럼 세상은 날로 풍성해지고 나도 그 풍성함을 따라 그렇게 달려왔는데 저물녁, 전기건조기로 바싹 말려나온 향기 나는 빨래를 개키며 문득 그리운 것들의 이름이 하나씩 떠오름은 어인 일인가.
찌그러진 양재기도 하나 없어 호박잎을 그릇 삼아 빨래비누 싸가지고 다니던 개울 가 그 친구는 어디서 살고 있을까. 돼지풀꽃 싸래기처럼 흩뿌려져 있던 그 개울가, 푸르던 물소리가 그립다. 그 개울물 따라 떠내려간 어머니의 손방망이 소리가 들릴것 같은 저녁, 물소리만 먹고도 하현달 밑으로 그득히 꽃을 피워내던 돼지풀꽃, 촌스런 이름 대신 고마리꽃으로 개명한 그 꽃들은 올해도 거기 피어 있을까. 병 든 울 어머니 오른팔은 다시는 손방망이를 잡을 수 없이 굳어져 버린 지 오래인데 그토록 무성하던 고마리꽃 무더기는 올해도 거기 피어 있을까.
댓글 안에 당신의 성숙함도 담아 주세요.
'오늘의 한마디'는 기사에 대하여 자신의 생각을 말하고 남의 생각을 들으며 서로 다양한 의견을 나누는 공간입니다. 그러나 간혹 불건전한 내용을 올리시는 분들이 계셔서 건전한 인터넷문화 정착을 위해 아래와 같은 운영원칙을 적용합니다.
자체 모니터링을 통해 아래에 해당하는 내용이 포함된 댓글이 발견되면 예고없이 삭제 조치를 하겠습니다.
불건전한 댓글을 올리거나, 이름에 비속어 및 상대방의 불쾌감을 주는 단어를 사용, 유명인 또는 특정 일반인을 사칭하는 경우 이용에 대한 차단 제재를 받을 수 있습니다. 차단될 경우, 일주일간 댓글을 달수 없게 됩니다.
명예훼손, 개인정보 유출, 욕설 등 법률에 위반되는 댓글은 관계 법령에 의거 민형사상 처벌을 받을 수 있으니 이용에 주의를 부탁드립니다.
Close
x