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룻밤 자고 나면 엄마 보는 거지?”
비 내리는 금요일 저녁, 딸아이가 또 문자를 보내왔다. 번복되기 잘하는 엄마의 약속에 못을 박는 문자였다. 독감에 걸린 것 같다고, 열이 난다고, 그리고 아픈 끝에 한국음식 먹고 싶어 김치찌개 끓이다가 잠들어 기숙사에 대소동을 일으켰다고, 배달될 때마다 강아지소리가 나도록 입력해 놓은 문자가 지난 한 주 내내 바쁜 내 등 뒤에서 앙앙거렸다. 연일 궂은비가 내리는 시월의 밤, 창밖은 우기에 젖어드는데 내 잠은 자꾸 바스락거리며 깨지고 주말에 가겠노라 약속을 했다.
비 쏟아지는 데크에서 아이가 주문한 치킨과 새우를 굽느라 우산 들고 서서 춥다는 시늉을 하는 남편에게 창을 통해 문자를 보여주고 김치찌개며 김치콩나물국, 매콤짭짤한 밑반찬을 마무리했다. 딸이 보낸 문자의 창을 닫으며 오랫만에 들어보는 하룻밤 자고 나면이라는 말에 눈길이 멎었다. 그리고 언젠가 외워보던 싯귀절같은, 그믐달 아래 대추나무 그림자 같은, 잊고 살았던 한 줄의 말 ‘하룻밤 자고 나면”이란 말의 아련한 추억에 잠겨들었다.
내 어릴적 자주 듣던 말, 배 아프면 배를 쓸어주시며, 이마에 화롯불같은 열이 날 때도, 넘어져 생채기가 나도 어머니와 할머니의 처방전은 “하룻밤 자고 나면”이었다. 그리고 거짓말같이 하룻밤 자고 나면 아프던 배가 가라앉고 뜨겁던 이마가 식어지고 쓰라리던 팔뒤꿈치의 생채기에 딱정이가 앉았다. “하룻밤 자고 나면 괜찮아진단다.” 주술처럼 외워지던 어른들의 혼잣소리를 들으며 잠이 들면 아침은 그렇게 날마다의 작은 기적으로 찾아오곤 했다.
산으로 둘러싸인 그 동네엔 그 하룻밤 사이에 크는 것들도 많았다. 솔가리불로 따스워진 아랫목에 자는 우리들의 키가 그랬고 쳇다리 위에 걸터 앉은 금간 시루 속의 콩나물들이 그랬다. 요술처럼 깜깜한 보자기 속에 콩나물을 키우시던 할머니는 봄에 내리는 비에게는 나물비라는 멋진 별명을 붙여 주시기도 했다. 나물비가 내리면 밤 사이 산밑이나 다랑이논둑의 나물들은 손뼘을 넘게 자라고 씨앗에서 갓 깨어난 남새밭의 채소들은 나비처럼 잎을 벌렸다.
그 산동네에 시월이 깊어지면 작년에 왔다 간 황아장수가 잊지 않고 찾아들었다. 할머니는 등이 휘이도록 큰 황아상자를 지고 나타나는 황아장수에게 우리 집에서의 하룻밤 잠을 허락하시곤 했다. 딱분, 연지, 머릿기름, 명주색실, 손거울, 골무, 쪽집개, 비녀…. 네모난 황아상자 안에는 없는 게 없었다. 그 황아장수가 하룻밤 자고 일어나 하루치의 무게를 던 황아상자를 어깨에 지고 떠난 자리엔 얼레빗 하나나 무명실 한 타래가 놓여져 있었다.
그 시골집을 떠나 도회지에 살며 가끔 찾아가던 할머니는 언제나 내가 하룻밤만 더 자고 떠나기를 원하셨었다. 할머니의 그 간절한 하룻밤을 슬쩍 뿌리치고 온 일, 그 때늦은 후회를 느낄 즈음부터 내게 하룻밤의 기적은 찾아오지 않았던 것 같다. 말짱해지고 거뜬해지고 수글어들고 잠잠해지는 하룻밤의 위력은 점점 내게서 멀어져 갔다.
아이들을 키우며 나도 그 “하룻밤” 처방전을 썼던 기억이 있다. 내 어릴적 팔뒤꿈치와 똑같은 자리에 난 아이의 생채기를 보며, 열이 들끓는 아이에게 약을 먹이며, 그 아이가 달래줄 수 없는 슬픔을 맞다뜨렸을 때 주술처럼 하룻밤 처방전을 써주면 아이들은 그 처방전에 눈을 꼬옥 감고 잠이 들었다. 잠든 아이들 곁에서 기도하는 밤, 내 어릴적 하룻밤 자고 나면 찾아오던 기적들의 비밀은 어머니의 기도였음을 깨닫기도 했다.
토요일 오후, 뉴욕으로 가는 하이웨이는 비가 그쳐 있었고 나무들은 그들의 사는 이유이기도 했던 나뭇잎들을 내려 놓을 준비를 서두르고 있었다. 저물녁에 도착하여 스산하게 하루해가 저무는 뉴욕의 빌딩 숲 밑에서 기다리고 있던 딸을 만나는 일은 반갑고도 짠한 일이었다. 아이는 독감치레와 중간고사 준비로 수척해져 있었다. 마른 논에 물 들어가는 것과 자식 입에 밥 들어가는 것이 세상에서 제일 보기 좋은 모습이라 했던가. 아픈 끝에 찾아온 아이의 식욕은 어릴적 사랑마루에서 고봉밥을 뚝딱 해치우던 상머슴아저씨를 떠올리게 했다.
냉장고를 꾹꾹 눌러 한국음식을 채워 주고 아이와 헤어지는 기숙사 앞은 열두시가 넘었는데도 대낮처럼 북적였다. 차가 떠나기를 기다리며 서있는 딸아이를 손짓으로 밀어 넣으며 또 여지없이 눈물이 솟았다. 십몇 년이나 살며 오갔던 익숙한 강변도로룰 다시 달려보며 잠들지 못하는 맨해튼을 바라보는 마음이 남달랐다. 딸아이가 어릴 때 나는 유모차에 아이를 싣고 박물관이며 화랑가를 자주 갔었다. 방싯대며 웃기를 잘해 지나는 사람들이 허리 숙여 볼을 만져보게 만들었던 아이는 자라서 아이의 고향인 뉴욕으로 돌아와 성냥갑같은 빌딩 속 한칸을 차지했고 비어버린 내 가슴은 숱한 이별의 이유들이 차지했다.
꼭대기까지 불을 밝힌 빌딩들이 하늘을 긁어대듯 서있는 맨해튼을 벗어나 하이웨이로 들어설 때쯤 아이는 밤길을 달릴 부모를 걱정하며 밤 새워 에세이를 써야 한다는 문자를 보내왔다. 밤에 자는 잠이 보약이라며 잠을 채근해보는 문자를 답으로 보냈다. 아이가 그 문자를 해독하기까지는 천날 밤, 아니 만날 밤이 지나야 할지도 모른다.
차에 가속도가 붙기 시작하면서 피곤이 몰려왔다. 눈을 감으니 산으로 둘러싸여 하늘이 잔칫집 채알만하던 동네, 뭇별들이 그 하늘에 고여 밤을 지새던 산동네가 보였다. 내 이마에 열이 오르면 할머니는 나를 사랑채로 데리고 가셨다. 밤새 잠들지 않고 내 이마에 손을 얹어보시며 “하룻밤 지나면 괜찮아진단다.” 혼잣소리를 하시던 할머니는 그 밤 윗목 콩나물시루에도 물을 주셨다. 자배기 안의 쪽박으로 콩나물시루에 물을 부으면 조르르조르르르, 노오란 콩나물 타고 내려오던 물소리가 내 잠 속으로 흘러들었다. 그리고 그 밤이 지나고 나면 거짓말처럼 내 이마는 식어지고 아픈 끝에 먹고 싶은 것들의 이름을 쫑알거리며 할머니를 따라다니면 할머니는 또 요술처럼 내 먹거리를 만들어 주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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