앞만 보며 달리다 어느 순간 멈춰서 돌아보면 주변이 아주 낯설게 느껴질 때가 있다. 의식 못하는 사이 멀고 새로운 곳에 도달한 것이다. 우리 삶이 바로 그렇다. 매일 그날이 그날 같은 데도 문득 둘러보면 많은 것이 바뀌어 있다. 항상 붙어 지내던 사람들이 삶의 어느 모퉁이에선가 떠나가고 그 자리를 다른 사람들이 메우고, 없으면 안 될 것 같던 물건들이 자취를 감추고 새로운 물건들이 익숙하다.
USA 투데이가 2년 전 지난 25년 동안 사라진 것 25가지를 선정해 보도했다. 1위는 실내흡연. 버스 안이든 극장 안이든 담배연기 자욱한 광경은 이제 우리 곁에 없다. 이어 풀 서비스 주유소, 소련의 위협, 타자기, 공중전화 박스, 석간신문, 트랜지스터라디오, 레코드판, 회전식 다이얼 전화기 등이 꼽혔다.
공중전화 박스, 트랜지스터라디오, 레코드판 … 중년층이라면 누구나 가슴 저린 추억 한 두가지 엮인 ‘희미한 옛 사랑의 그림자’ 같은 물건들이다.
여기에는 포함되지 않았지만 그림자마저 희미해진 옛 사랑 같은 것이 있다. 편지다.
하얀 종이를 앞에 놓고 감정을 고르고 생각을 다듬으며 또박또박 써 내려가던 편지, 읽고 또 읽으며 찢고 다시 써서 마침내 가장 순수한 감성과 사유의 결정을 담아내던 편지가 사라지고 있다. 이메일, 셀폰 등 첨단 테크놀로지의 총아들에 떠밀려 뒷방 늙은이 같은 신세가 된 것이다. 그 직격탄을 세계 각국의 우체국들이 고스란히 맞고 있다.
영국은 오는 22일 우체국 직원들이 전국파업에 돌입한다고 해서 술렁술렁하다. 우정국 격인 로열 메일 그룹이 경영난으로 구조조정과 시설 현대화를 추진 중인데 그 정도를 두고 노조 측이 반발하고 나섰다. 생계를 위협받기 때문이다. 하지만 지난 4년 사이 우편물이 10% 이상 줄고 보면 경영진 측도 선택의 여지가 별로 어렵다.
미국의 상황 역시 비슷하다. 80년대, 90년대만 해도 연방공무원 직이라는 이유로 한인들에게 인기가 높았던 우정국은 지금 구조조정의 벼랑에 몰려있다. 우정국 근무경력 31년의 마케팅부 간부인 황용택 씨는 지금 완전히 비상이라고 전한다.
미 우정국은 독립 1년 전인 1775년 창설돼 역사가 234년이나 된다. 그 긴 역사동안 올해만큼 힘든 때가 없었다고 황씨는 말한다. 현재 미 전국의 우체국 수는 3만4,000개소. 그 숫자가 언젠가는 1만5,000개 수준으로 줄어들 것으로 그는 내다보고 있다.
우정국이 우편물 감소에 대비를 하지 않은 것이 아니었다. 하지만 최근 그 줄어드는 속도가 너무 급격해 대대적인 구조조정이 불가피해졌다. 공격적 인원 감축과 아울러 수익성 없는 우체국 700개소를 폐쇄명단에 올렸고, 현행 주 6일 배달을 5일로 줄이도록 관련 법 개정을 연방의회에 요청해둔 상태이다.
우리가 더 이상 편지를 쓰지 않는 것도 영향이 있지만 우정국에 가장 타격이 큰 것은 사업상의 모든 서류나 결제가 온라인으로 처리되는 추세이다. 우표 쓸 일이 없어지는 것이다.
지금은 ‘순간의 시대’라고 할 만하다. 마우스나 셀폰 버튼 한번 꾹 누르는 ‘순간’이면 온갖 필요가 채워진다. 누군가를, 누군가의 소식을 무작정 애타게 기다리는 고통 혹은 낭만은 이제 구시대의 유물이 되고 있다. 기다릴 필요가 없는, 그래서 도무지 기다리지를 못하는 조급증이 만연해 있다.
이 조급한 시대에 편지는 속 터지게 답답한 수단인 게 사실이다. 종이 꺼내놓고 펜을 들어 한자 한자 손으로 써서 봉투에 넣고 우표 붙인 후 우체통까지 가서 부치는, 길고 번거로운 과정은 자동차 대신 마차를 타는 것만큼이나 비효율적이다.
그런데 편지의 가치는 바로 그런 비효율성에 있다. 질량불변의 법칙 같은 것이다. 한통의 편지를 써서 부치느라 쏟은 정성은 신기하게도 받는 사람의 마음에 그대로 전달이 된다. 후루루 적어 보내는 이메일과는 주는 감동이 다르다. 느림과 그리움과 기다림으로 한껏 무르익은 결정체가 편지다.
편지를 받아 본게 언제인가. 써본 것은 또 언제인가. 가을에 편지를 쓰자. 우표 한 장 44센트로 주고받을 수 있는 행복은 무한하다. 특히 이런 편지라면.
오늘도 나는/ 에메랄드 빛 하늘이 환히 내다뵈는/ 우체국 창문 앞에 와서 너에게 편지를 쓴다 … 설령 이것이 이 세상 마지막 인사가 될지라도/ 사랑하였으므로 나는 진정 행복하였네라<유치환 ‘행복’ 중에서>
권정희 논설위원
junghkwon@koreatime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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