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이 제2의 생일입니다.”
신창현 옹(84, 사진)은 해마다 10월 16일이 되면 구사일생으로 목숨을 건진 59년 전 아찔했던 기억에 잠긴다.
황해도 연백에서 출생한 신 옹은 1950년 한국전 발발 당시 고향에서 초등학교 교사를 하고 있었다. 그때는 연백이 38도선 남쪽에 있었다.
북한군이 진주했을 때 피난 가지 못했던 신 옹은 잠시 인근으로 피신했으나, 교사는 계속 아이들을 가르치도록 한다는 소문을 듣고 학교로 복귀했다. 당시 귀했던 고성능라디오를 갖고 있던 신 옹은 우연히 주파수가 잡힌 대전방송을 통해 맥아더 장군이 유엔연합군을 이끌고 참전한다는 뉴스를 들었고, 이를 동료교사에게 얘기했다. 그게 화근이었다. 7월 9일 집에 갑자기 북한 정치보위부 요원들이 들이닥쳐 그를 체포했다. 불온한 소식을 퍼뜨렸다는 게 이유였고, 미군정시절 경찰 전력도 드러났다. 지서 유치장과 해주경찰서를 거쳐 10월 초순 형무소에 수감됐다.
일주일 가량 머문 10월 16일 이례적으로 낮에 수감자들을 다 불러 낸 후 작은 방으로 몰아넣었다. 수십 명이 좁은 공간에 갇혀 움직이기 힘들 정도였다.
이 날은 매 끼니마다 거르지 않던 밥도 밤늦게까지 주지 않다 한밤중에 배식을 했다. 앞쪽에서 먼저 밥을 받아 먹던 사람들이 국맛이 쓰다며 인상을 찌푸렸다. 나중에 알고 보니 독이 들어 있었다. 그리고 모두가 밥을 채먹기도 전에 철창 밖에서 불길이 치솟았다.
인민군이 유엔군과 국군의 인천상륙과 9.28 서울수복으로 북으로 퇴각하면서 형무소에 불을 지른 것이다.
빠져나갈 도리가 없으니 모두 다 죽었다고 체념했다. 일부는 고향을 향해 큰 절을 하기도 했다. 어느 순간 나무로 된 감방문을 수감자들이 부쉈고, 가까스로 빠져나왔다. 다행히 신 옹이 수감돼 있던 방은 불길이 일어난 곳과 반대쪽이었다. 안쪽의 재소자들은 미처 빠져나오지 못하고 다 불에 타 죽었다.
교도소 마당에는 겨우 탈출한 사람들이 고향별로 무리를 지어 모였다. “대한민국 만세”도 불렀다. 교도소 문이 열렸다고 해 다들 몰려 나갔다. 순간 총소리가 들렸고, 앞서 나간 사람들의 비명이 들렸다. 일부 인민군들이 입구 밖에서 지키고 있다 총격을 가한 것이다. 신 옹은 다시 땅에 엎드려 총소리가 멎기를 기다린 후 교도소를 빠져나갔다.
하지만 이때까지도 목숨을 완전히 건진 게 아니었다. 시내 곳곳에서는 총소리가 여전히 들렸다. 시가전이 벌어진 듯 했다. 해주 동중학교를 기차통학해 해주 지리에 밝은 신 옹은 고향사람 7-8명과 함께 민가 거리로 도망쳤고, 한 주민의 도움을 받아 지하 방공호로 대피했다. 하지만 인민군에 쫓기던 다른 사람이 방공호로 뛰어들면서 숨어 있던 것이 발각됐다.
밖에서 다들 나오라고 소리치자 ㄱ자 형태로 된 방공호 바깥에 있던 사람들은 나갔지만 안쪽에 있던 신 옹과 다른 2명은 이래저래 죽기는 마찬가지라는 심정에서 숨죽이고 계속 숨어 있었다.
다행히 인민군은 나간 사람들만 데리고 사라졌고, 아득히 총소리가 들렸다.
인근 자동차정비공장으로 옮겨 숨어있던 신 옹 일행은 밖에서 들리는 영어 소리를 듣고 유엔군이 진주했음을 직감, 거리로 나왔다. 차를 타고 가는 미군을 보는 순간 살았다는 생각에 눈물이 절로 하염없이 쏟아졌다. 그제사 신 옹 등을 해주시민들이 애국자라며 대형 여관으로 옮겨 환대하며 기거하게 해줬다. 며칠 후 우연히 거리에서 옛 경찰동료를 만난 덕에 고향에 돌아온 신 옹은 다시 한번 가슴을 쓸어내렸다. 탈출한 재소자들 중 바로 고향으로 돌아간 사람들은 모두 중간에서 인민군과 마주쳐 죽었다는 것.
신 옹은 1.4 후퇴 때 유엔군을 돕던 경찰인 동서의 도움으로 가족과 함께 남하했다.
그 후 신 옹은 1951년 경기도 교육청을 찾아 화성군 향남초등학교 피란민 수용소에서 교사로 복직했고, 경기도 일대 및 인천에서 초등학교 교사로 지내다 퇴임했다. 그는 1987년 딸 초청으로 플로리다 올랜도로 이민왔고, 4년전 볼티모어로 옮겨왔다. 한국에 1남3녀, 미국에 1남1녀의 자녀를 두고 있다.
신 옹은 미국에 와서 외로움에 교회에 다니기 시작했다면서, 신앙생활을 하면서 자신의 구사일생이 하나님의 도움이라는 것을 알았다고 말했다.
홀어머니의 외아들이었던 신 옹은 남하할 때 모친도 모시고 나왔지만 당시 양측의 경계가 허술해 경계지역은 왕래가 있었던 터라 집에 잠시 들리겠다고 간 모친은 다시 돌아올 수 없었다.
고향에 가보고 싶은 망향의 꿈은 이루지 못했지만 그는 “죽기 전에 구사일생의 삶을 알리고 싶었다”며 “은혜속에 살기 때문에 감사의 삶을 살고 있다”고 말했다. <박기찬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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