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0년대 초 웨스트버지니아에 살 때 가족처럼 가깝게 지낸 백인 노부부가 있었다. 그 댁을 자주 드나들며 미국인들의 생활문화를 많이 알게 되었는데, 그때 내게 문화적 충격 비슷한 것이 있었다. 너무 편한 고부관계였다.
타 지역에 사는 아들 가족이 방문할 때면 그 부인은 하루 종일 정성껏 음식을 준비했다. 시댁에 온 며느리는 시어머니가 차려준 식탁에서 맛있게 식사를 하고, 도란도란 이야기를 나누고, 식사 후 같이 뒷정리를 할 뿐이었다. 시어머니가 차려주는 밥상을 며느리가 그렇게 편안하게, 손님처럼 우아하게 받을 수 있다는 사실이 한국에서 갓 온 내게는 놀라웠다.
추석 한주 전부터 한국에서는 또 ‘명절 증후군’이 거론되었다. 대가족이 모인 시댁에서 삼시세끼, 간식, 밤참, 술안주 … 준비하느라 허리 한번 못 펴고 일만 할 생각을 하면 며느리들은 명절 전부터 머리가 지끈거리고 가슴이 답답하며 우울증이 생긴다고 해서 생긴 용어다.
’증후군’의 근본원인은 불공평이다. 전통적 가부장제의 질서에 기초한 불공평이다. 사람들이 모이면 먹는 일부터 치우는 일까지 일이 많은 데, 그 일이 온전히 여성들의 차지이고 남성들은 노는 데만 바쁘고, 여성 중에서도 며느리들에게 책임이 몰리고 딸들은 해도 그만 안 해도 그만이니 불공평하다는 불평이 터져 나오는 것이다.
이민 1세 여성이라면 누구나 경험해본 일, 미루어 짐작가능한 분위기이다.
가족 관계의 성격을 바꾸지 않고는 ‘증후군’에 해답이 없을 것 같다. 모든 관계가 상하의 수직구조로 의무와 도리로 얽어 매여 있으니 요즘 같은 평등사회에, 특히 젊은 여성들에게는 용납이 되지 않는 것이다.
부모와 성인자녀, 시어머니와 며느리의 관계가 전통적 틀을 벗고 서로 인격적으로 가까워지는 것이 중요한 데, 미국 생활을 오래한 이민1세 주부들이 그 모범을 보이고 있다. 30년 전 내가 백인 노부인을 보며 부러워했던 멋쟁이 시어머니 모습을 딱 그대로 보여주는 주부들이다.
추석이나 추수감사절, 크리스마스, 설날 같은 명절이면 누가 음식장만을 하는지를 60·70대 주부들에게 물어보았다. 하나같이 내가 차려서 아이들을 부른다고 했다. 대개 은퇴한 이들은 시간적 경제적으로 여유 있고, 건강하고, 집도 자녀 집보다 넓으니 자신들이 상을 차려 아들딸 내외를 초청한다고 했다.
시어머니들의 의식이 바뀐 결과이다. 한국의 전통적 시어머니들과 달리 이민1세 여성들은 미국에 살면서 사회생활을 한 경험이 의식 변화의 큰 요인이 되는 것 같다. 집 울타리 안을 활동반경으로 곳간열쇠 놓고 며느리와 파워게임 하던 세대와는 시각이 다를 수밖에 없다.
수십년 사회활동을 한 이들은 스스로에 대한 자신감이 있고, 일하는 젊은 엄마들에 대한 생생한 이해가 있다. 그런 자신감과 이해가 대접 받기보다는 베풀기를 좋아하는 너그러운 시어머니, 그래서 당당한 신종 시어머니를 만들어 내는 것 같다.
지인 중에는 명절뿐 아니라 어머니날과 자신의 생일에도 직접 상을 차리는 주부가 있다. 삼남매를 기르는 딸과 둘째를 임신한 며느리를 위해 어머니날 파티를 열고, 생일이면 엄마 생일이다. 와서 밥 먹어라 전화하고는 직접 상을 차린다. 자녀들에게 기대하고, 뜻대로 안되면 실망하고 서운해 하느니 스스로 먼저 베푸는 것이 마음 편하다고 한다.
그런가 하면 바뀐 세태에 적응한 부분도 없지는 않다. ‘요즘 며느리는…’ 식의 이야기들을 통한 간접교육의 효과이다. 예를 들면 이런 이야기이다.
어느 부부가 결혼한 아들에게 집을 사준 후 열쇠를 하나 챙겨두었다. 며느리가 일하느라 바쁘니 시어머니가 틈틈이 김치며 반찬을 날라다 주려는 의도였다. 그렇게 몇 번을 했을까, 며느리가 정색을 하며 부탁을 하더라는 것이다 - 집에 오시려면 미리 전화하고 오세요
출근시간에 쫓겨 침대시트며 속옷이며 마구 널어놓은 것을 시어머니가 와서 보는 게 며느리는 싫은 것이었다. 하지만 ‘며느리도 딸’이라 여기고 힘닿는 대로 도와주려던 시어머니는 얼마나 기막히게 서운했을까.
명절에 가장 중요한 것은 가족 구성원 모두가 편한 마음으로 모여 즐겁게 지내는 것이다. 음식장만 부담 때문에 가족들이 모임을 피한다면 슬픈 일이다. 상 차리는 시어머니는 그런 의미에서 가장 지혜로운 시어머니이다.
권정희 논설위원
junghkwon@koreatime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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