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혹성 탈출’에서 본 듯한 황량한 하늘이 남가주를 둘러싸고 있다. 지난달 26일 LA 북쪽 앤젤러스 국유림에서 발생한 산불이 열흘째 계속되면서 불그스름한 회색빛의 연기 층이 뿌옇게 하늘을 덮고 있다. 불길은 이제 주택가를 뒤로 하고 망망한 산맥으로 방향을 틀었지만 이미 주택 64채와 3개 상가건물, 창고 등 부속건물 49채를 태운 후다.
남가주에서 산불이 너무 잦다. ‘캘리포니아’ 하면 ‘지진’이 최대의 불안거리였는데 언제부터인가 ‘산불’이 그 자리를 차지했다.
겨울의 짧은 우기를 지나고 나면 일년내내 비 한방울 안 내리는 남가주는 산불 위험이 높을 수밖에 없다. 봄여름 지나는 동안 따가운 햇볕이 쨍쨍 내리쬐면서 광활한 산야의 잡목과 덤불은 바삭바삭 소리가 나도록 건조해진다. 여기에 고온의 가을바람, 샌타애나가 몰아치면 불씨 하나로 산 전체를 태우기 일쑤다.
캘리포니아에서 대형화재(the Great Fire)로 처음 이름이 붙은 것은 1889년 샌디에고·오렌지카운티 일대를 태운 산불이었다. 이어 1970년, 1993년, 2003년, 2007년 대형화재가 발생했다. 주목할 것은 81년, 23년 만에 발생하던 대형 산불이 최근에는 10년 만에, 그리고 4년 만에 거듭 발생했다는 사실이다.
이번 산불이 LA 카운티 내에서는 최대 산불이지만 2003년과 2007년의 산불과는 비교도 되지 않는다. 2003년 10월말에는 LA 인근 5개 카운티에서 동시다발적으로 산불이 발생, 건물 3,000여 채가 불타고 20여명이 목숨을 잃었다. 2007년 10월 산불은 남가주 7개 카운티에서 동시에 일어나 2.000여 채의 건물이 불타고 7명이 사망했다.
그 사이에 산불이 없었던 것도 아니다. 2000년대 들어서는 규모나 피해가 다를 뿐 매년 산불이 있어 왔다. 예를 들어 우리가족은 2005년 9월말 길 건너편까지 산불이 들이닥쳐 대피를 해야 했다. 대피령이 해제된 날 아침 동네로 들어설 때의 조마조마함, 모퉁이를 도는 순간 온전하게 서있는 집을 보았을 때의 안도감은 지금도 생생하다.
“물과 불, 정부는 자비라는 걸 모른다”는 속담이 있다. 세금 마구 거둬들이는 정부를 비아냥거리는 속담이겠지만 지난 한 세기 개발 일변도로 달려온 우리에게는 지금 물과 불이 더 무자비하다. 자연은 자연의 질서로 움직일 뿐, 자연의 영역을 함부로 침범한 인간들을 위해 예외를 두지 않는다.
남가주에서 산불이 잦다면 미시시피 강이 관통하는 중부에는 홍수가 잦다. ‘미시시피 대홍수’로 기록된 첫 케이스는 1927년 홍수였다. 이후 다시 대홍수가 난 것은 60여년 만인 1993년이었다. 그리고는 지난해 6월 다시 대홍수가 나서 아이오와, 일리노이, 미주리 등지에서 엄청난 피해가 발생했다.
이들 대홍수는 ‘500년 표준형’ 홍수로 분류된다. 한해를 기준, 발생확률이 500분의 1인 홍수, 그래서 500년 만에 한번 올까 말까한 홍수라는 의미다. 그런 대홍수가 불과 15년 만에 다시 오고, 남가주에서는 대형 산불이 몇 년 사이로 잦아지는 원인은 근본적으로 같다. 자연의 영역으로 존중하며 남겨둬야 할 강안과 산속을 사람들이 기어이 개발해서 들어가 살기 때문이다.
남북으로 2,300마일을 흐르는 미시시피 강 양쪽에는 원래 수마일에 이르는 드넓은 습지대가 펼쳐져 있었다. 억센 잡초들이 무성하게 자라는 습지는 천연의 스폰지다. 폭우로 강물이 넘치면 물을 빨아들여 홍수를 막아주는 역할을 한다.
그런데 1930년대부터 미시시피를 따라 개발이 진행돼 주택단지가 들어서고 농토가 조성되면서 100만 에이커의 습지대가 사라졌다. ‘스폰지’가 없으니 폭우가 내리면 그대로 홍수가 된다.
캘리포니아에서는 지난 1950년 이후 인구가 3배로 늘었다. 돌아서면 바로 산이 있고, 숲이 있고, 바다가 지척인 지형적 매력 덕분이다. 그런 천연의 조건을 마음껏 누리려다 보니 집은 점점 산으로 올라가서 신규 주택의 50% 이상이 산불위험 지역에 들어섰다. 가만있어도 자연발생적으로 산불이 나곤 하는 데 사람이 들어가서 생활하니 실화 위험도 방화 위험도 높아졌다.
“공짜 점심은 없다”는 말은 자연에도 해당되는 것 같다. 20세기에 자연을 마구 파헤치며 개발한 대가를 21세기에 치르게 되는 모양이다. 자연의 영역을 침범한 벌이다.
권정희 논설위원
junghkwon@koreatime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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