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주 김대중 전 대통령이 서거하더니 이번 주에는 에드워드 케네디 상원의원이 세상을 떠났다. 한국민들의 의식 속에 ‘김대중’이라는 이름의 뿌리가 깊듯, 미국인들에게 ‘케네디’는 정서적 애착의 뿌리가 깊다. 근 반세기 미국사회를 주도했던 정치 거목을 잃은 슬픔, 그와 동시에 케네디 가의 시대가 막을 내린 데 대한 서운함으로 미국은 애도 중이다.
“올해는 왜 이렇게 사람들이 많이 죽을까?” - 요즘 어느 자리에 가나 듣는 말이다. 지구상에서 매 1분마다 평균 100여명씩 죽고 있다는 사실을 생각하면 이 질문은 객관적으로 맞지가 않다. 하지만 우리의 가슴을 치는 죽음, 슬픔으로 와 닿는 죽음을 생각하면 정말이지 올해는 유난히 많은 분들이 세상을 떠났다.
2월 김수환 추기경 선종 이후 5월 노무현 전 대통령, 8월 김 전 대통령이 별세했고, 미국에서는 6월 마이클 잭슨의 갑작스런 죽음으로 전 세계가 충격에 빠지더니, 장수하던 월터 크롱카이트가 7월에 세상을 떠났고 이어 케네디가의 누나와 동생이 며칠 간격으로 나란히 떠났다.
유명 인사들만이 아니다. 50대 초반의 한 남자후배는 지난달 친구가 밤새 심장마비로 세상을 떠나 충격을 받았다. 건강에 문제가 없던 친구가 하루아침에 저 세상 사람이 되었으니 “산 게 산 게 아니다”며 그는 얼떨떨해했다.
60대 후반의 지인은 “요즘 장례식에 너무 자주 가게 되어 우울하다”고 했다. 친구들이 여럿 죽었다고 한다. 위로가 될까 해서 “50 갓 넘은 후배도 친구가 죽었다”고 소식을 전했더니 그 분의 해석은 달랐다. 어쩌다 단명한 친구가 죽은 것과 죽음이 찾아들 나이가 되어서 친구들이 죽는 것을 보는 건 다르다고 했다.
사람은 살아온 나이만큼 삶에 대해서 이야기를 할 수가 있다. 죽음도 그렇다.
유년기에 죽음은 ‘비현실’이다. 영화나 이야기 속에 나올 뿐 현실에는 없다. 젊은이들에게 죽음은 아득한 ‘풍문’이다. 소문으로는 들리지만 모습은 보이지 않는다. 죽음이 지평선 너머로 모습을 보이기 시작하는 것은 40대 즈음. 동창 중에 누군가가 병으로, 사고로 세상을 떠나는 ‘믿기 어려운 사건’들이 발생한다.
그리고 나면 그 후부터 죽음은 남가주 산불 같다. 지금 LA 인근은 서너 군데서 산불이 나서 공기가 메케하고 잿빛 구름들이 두터운 띠를 두르고 있다. 남가주 산불은 한해도 거르는 법 없이 반드시 찾아온다는 점, 처음에는 연기로 겨우 존재를 드러내다가 멀리 산 너머에서 불길이 보이기 시작하고 차츰차츰 동네 어귀로 다가들며 한집 두집 태우고, 결국은 동네 전체를 삼켜버린다는 점에서 비슷하다. 공간적으로 이웃한 집들이 하나 둘 불의 방문을 받듯이 나이로 이웃인 동년배가 하나 둘 죽음의 방문을 받는다.
13세기 아랍의 시인 잘랄루딘 루미는 인간을 여인숙에 비유했다. “인간이라는 존재는 여인숙과 같다/ 매일 아침 새로운 손님이 도착한다 // 기쁨, 절망, 슬픔…” 그런데 “그 모두를 환영하고 맞아들이라 … 모든 손님은 저 멀리에서 보낸/ 안내자들이니까”라고 그는 시 ‘여인숙’에서 노래했다.
‘기쁨, 절망, 슬픔’의 손님들이 찾아들던 여인숙에 어느 날 마지막으로 찾아드는 손님이 ‘죽음’이다. 그 역시 ‘저 멀리서 보낸 안내자’일 것이니 똑같이 ‘환영하고 맞아들이’는 것이 마땅할 것이다.
‘죽음’이 동구 밖에 모습을 드러낸 후 케네디 상원의원은 남은 날들을 잘 살아낸 것 같다. 15개월 전 뇌종양 진단을 받은 후 그는 “시간이 얼마가 남았든 끝마무리를 잘 하겠다”는 말을 하곤 했다고 한다.
그래서 추진 중이던 입법안들을 다른 의원들에게 맡기고, 회고록을 서둘러 끝내고, 한편으로는 평생 해오던 일과를 변함없이 계속했다. 매일 아침 일어나 포치에 앉아 커피를 마시며 신문을 읽고 애완견들의 배를 긁어주고, 제임스 본드 영화를 모두 다시 보고, 가족들과 함께 하는 저녁식사 파티를 자주 했다고 한다. 달라진 점이 있다면 이전보다 ‘솔직함과 포옹과 감정’이 훨씬 더 풍성했던 것.
그리고는 옛 동료들에게 불쑥불쑥 전화해서 안부를 전했는데 모든 대화를 시작하기 전 항상 한마디를 먼저 했다고 한다 - “매일 매일이 선물이라네(Everyday is a gift)!”
“하루를 잘 보내고 나면 행복한 잠이 찾아들 듯, 인생을 잘 살고 나면 행복한 죽음이 찾아든다”(레오나르도 다 빈치)고 했다. 그의 마지막 15개월이 그랬던 것 같다.
권정희 논설위원
junghkwon@koreatime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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