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회합이 있다고 하더군요. 그리고는 우리를 어디론가 데려갔는데, 문을 통과하니 … 앞에 빌 클린턴 대통령이 서있는 겁니다”
5일 새벽 버뱅크 공항에서 로라 링 기자가 귀환 감사성명을 발표하면서 몇 시간 전의 감격을 전했다. 북한에서 12년 노동형을 선고 받고 수용소로 끌려갈 날이 언제일까 가슴 졸이던 유나 리, 로라 링 두 여기자가 마침내 집으로 돌아왔다.
이번 여기자 석방은 관련자 모두에게 이득이 된 전형적인 윈-윈이다. 지옥 같은 억류생활에서 풀려난 여기자들과 그 가족들, 미국의 전직 대통령을 끌어들임으로써 자신의 위상과 건재를 과시한 김정일, 원로 정치인으로서의 면모를 전 세계에 확실하게 각인시킨 클린턴, 그리고 공적 채널의 부담 없이 대북 대화의 실마리를 얻은 오바마 행정부 - 모두가 만족한 산타클로스 선물보따리 같은 작전이었다.
하지만 한사람, 입맛이 좀 씁쓸한 사람이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새벽의 기자회견을 보면서 떠올랐다. 여기자들이 속한 커런트 TV의 공동 대표 알 고어 전 부통령이다. 기자들 억류상황에 가족 못지않게 노심초사했던 그는 이들의 무사귀환에 물론 기뻐했다. ‘석방 드라마’의 주연인 클린턴에게도 깊은 감사의 뜻을 전했다. 트랩 밑에서 두 사람은 악수를 하고 등을 두드리며 포옹하기를 ‘5초나’ 계속했다고 미디어들은 호들갑을 떨었다.
미디어들의 호들갑에는 이유가 있다. 민주당 최고위급 지도자들인 두 사람이 오랜 세월 껄끄러운 관계였기 때문이다. 이번 석방 협상만 해도 고어는 자신이 나서고 싶었지만 북한 측이 클린턴의 방북을 요청, 뒤로 물러나야 했다. 온갖 조건 다 갖춘 자신이 왜 항상 클린턴에게 밀려야 하는지 고어는 그날 새벽 씁쓸했을 수도 있을 것 같다.
영화 ‘아마데우스’를 보면 궁정악장 살리에르는 모차르트의 천박한 행동 때문에 더욱 상처를 입는다. 살리에르는 밤잠 안자고 심혈을 기울여 작곡을 하지만 모차르트가 장난치듯 한순간에 만들어내는 곡을 따라가지 못한다. 그런 천재성이 개망나니 같은 모차르트에게는 부여된 반면 신앙심 깊은 자신에게는 허용되지 않은 사실이 그에게는 천형 같은 고통이었던 것으로 영화는 그리고 있다.
올곧은 사람들이 살아가면서 부딪치는 좌절이 이런 것이다. 들여다보면 흠투성이인데 왠지 쑥쑥 잘 나가는 친구나 동료들이 있다. 고어에게는 클린턴이 그런 존재가 아닐까 싶다.
클린턴은 ‘백합 같은’ 정치인은 아니다. 1992년 캠페인 때부터 잡음이 끊이지 않았다. 여러 여자들과의 섹스 스캔들에 부동산개발 관련 스캔들이 이어지더니 마침내는 1998년 백악관 인턴과의 스캔들이 터지면서 하원에서 탄핵까지 받았다. 상원에서 탄핵안이 부결되기는 했지만 그 정도면 정치생명이 끝장날 수도 있는 일이었다.
하지만 클린턴은 재임 중 여전히 높은 지지율을 유지했고 퇴임 후에도 구설수에 휘말릴 때마다 용케도 살아남더니 이제는 존경받는 원로 정치인으로 자리를 잡았다. 비결은 대인관계의 능력이다.
정치인으로서 클린턴의 탁월한 능력 중 대표적인 것은 친화력이다. 아무리 그에게 반대하던 사람이라도 일단 그와 마주 앉고 나면 그의 편이 된다고 한다. 반면 고어는 원칙에 충실한 올곧음이 특징이다. 항상 너무 진지해서 ‘통나무’라는 별명이 따라다녔다.
클린턴이 ‘원만함’을 추구하는 타입이라면 고어는 ‘완벽함’을 추구하는 타입이다. 전자는 소위 ‘선명성’은 떨어지는 대신 주위에 사람이 꼬이는 반면 후자는 털어서 먼지는 안 나지만 주변에 사람이 별로 없는 경우가 많다.
이들 두 타입은 눈에서 드러난다고 한다. 전자는 사람만 보면 반갑게 끌어안는 시선인 반면 후자는 일단 경계부터 하는 시선이 특징이다. 테네시의 토박이로 고어 부자를 수십년 알고 지낸 정치전문기자의 관찰이다. 찰스 바틀렛이라는 이 기자는 ‘붕어빵’ 고어 부자의 특징으로 ‘거리를 두는 듯한 시선. 쉽게 사람을 믿지 못하는 시선’을 꼽았다.
“물이 너무 맑으면 고기가 없고(수청무대어 水淸無大魚) 사람이 너무 따지고 살피면 따르는 사람이 없다(인지찰즉무도 人至察卽無徒)”고 했다. 기질적으로 완벽함을 추구하는 타입은 참고해볼 말이다.
권정희 논설위원
junghkwon@koreatime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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