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LA타임스 푸드섹션 객원기자 영어 한식 요리책 2권 낸 이혜진
친정 엄마가 차려주는 밥상은 세월이 갈수록 눈물겹다. 그게 단지 밥과 국에 소박한 찬뿐일지라도 엄마의 밥상은 그 모녀 사이 흐른 시간의 두께만큼 코 끝 찡한 세레나데며 그 둘만의 자서전이기 때문이다. 그래서일까. 엄마의 노동과 수고가 애잔히 녹아 있는 밥상 넙죽넙죽 받아먹고 알토란처럼 자란 딸아이는 엄마의 눈매며 입 매무새만 닮는 게 아니라 누가 가르쳐 준 것도 아닌데 손맛까지 쏘옥 빼다 박는다. 특히 고국 떠나 30년 넘는 타향살이 한복판에서 모녀의 손맛 대물림이란 더 각별할 수밖에. 맞다. 율리아(68)·혜진 리(세실리아·38) 모녀에게 모름지기 음식이라 함은 물설고 낯선 땅에서 그들을 하나로 이어주는 가늘고 모진 끈이었으며 때론 무조건 뭉쳐야 하는 뜨거운 연대의
깃발이기도 했으리라. 아주 오래 전부터 주말이면 사람들 불러 거둬 먹이는 것을 좋아하는 부모님 덕분에 아홉 살 꼬마 여자아이는 잔칫상 한켠에서 녹두전 지지고 잡채를 버무려야 했단다. 아마도 혜진씨, 그 왁자지껄 흥겨운 잔치풍경 속에서 녹두전처럼 텁텁한 듯 폭신한 세상 인정을 배우기도 했을 터이고 어느 가을 밤 송편을 빚어내면서는 그 떡 안에 자신의 미래를 꼭꼭 빚어
넣기도 했으리라. 이렇게 그녀, 엄마가 만들어주는 음식을 통해 차곡차곡 세상에 문을 내고 삶의 지혜를 키워왔다. 이 알콩달콩 행복한 모녀를 빛살 좋은 어느 오후, 토마토며 고추가 예쁘게 여물어 가는 화사한 텃밭 내려다 뵈는 혜진씨의 작고 아담한 부엌에서 만나봤다. 모녀와의 대화는 즐거웠고 덤으로 맛있기까지 했다.
#팔방미인, 한국요리 전도사가 되다
사실 혜진씨의 직업을 한 마디로 잘라 말하는 건 불가능해 보인다. 현재 그녀는 10년 가까이 LA타임스 푸드 섹션 객원기자로 일하고 있으며 지난달 막 출간된 ‘코리안 쿠킹’을 포함, 2권의 한식 요리책을 발간한 요리 전문가이기도 하다. 그러다 보니 강의 의뢰도 빈번해져 한식 요리를 가르치는 요리강사로도 활약 중이다. 그런가하면 지난해에는 유명 여행전문 출판사인 포머스(Fommers)를 통해 ‘한국’ 편을 출간한 전문 여행 작가이기도 하다. 이뿐 아니다. 원래 그녀의 전공은 현대미술. 그래서 해마다 동료 작가들과 수 차례 전시회를 갖기도 하는 등 정말이지 몸이 10개라도 모자랄 판이다.
“10년 전쯤 문득 아침에 일어나서 작가가 돼야겠다고 생각했어요(웃음). 어려서부터 책 읽고 글쓰는 것을 좋아했죠. 물론 쉽진 않아요. 누가 억지로 글쓰라고 떠다민 게 아니니까 결국 자신과의 끊임없는 싸움이 되죠. 그래도 제가 좋아하는 요리며 여행을 글로 쓰고 이걸로 먹고 살 수 있으니 이보다 행복 할 순 없겠죠?”
최근 두 번째 영어로 된 한국 요리책을 발간한 이혜진씨와 그녀의 30년 ‘요리 스승’인 어머니 율리아 리씨가 혜진씨의 작업실에서 다정하게 웃고 있다.
영어 요리책 2권
‘한식 전도사’인기
# “내 요리책의 원천은 어머니”
혜진씨의 어머니 율리아씨는 딸과 다른 듯 닮았다.
혜진씨가 내성적이고 조용한 성격이라면 어머니는 보다 더 활달하고 여장부 스타일에 가깝다고나 할까. 아니나 다를까. 그녀는 지금도 비즈니스를 운영하면서 성당 봉사활동도 열심인 수퍼우먼이었다.
“어머니 요리 솜씨는 제가 어렸을 때도 유명했어요. 거기다 아버지는 사람들 불러 음식 먹는 걸 즐기셨죠. 그래서 주말이면 성당 식구들을 비롯 지인들이 몰려들었고 20~30인분은 손님 접대 축에 들지도 못했어요.(웃음)”
그때 상차림에 오른 메뉴들은 직접 곱게 간 녹두로 부친 녹두전과 잡채, 돼지갈비, 불고기, 갈비 등 열거할 수가 없을 정도라고 한다. 당연히 김치 담가 먹는 것은 기본 중 기본. 배추김치는 물론이고 동치미, 깍두기, 오이김치에 파김치까지 각종 김치를 율리아씨는 지금까지도 직접 담가 먹는다고.
“혜진이가 한 아홉 살 됐을래나. 그때부터 손님 초대하면 녹두전이며 부침개 부치는 것은 혜진이 몫이었어요. 중학생때부터는 꼭두새벽에 일어나 우리식구 5인분 점심까지 등교 전에 준비해 놓을 정도였어요. 그러다보니 자연스레 그 어린 나이부터 저녁식사도 혜진이 담당이 됐죠.(웃음) ”
그뿐이 아니다. 한국 명절을 잊으면 안 된다는 생각에 율리아씨는 추석이면 온 가족이 둘러앉아 송편을 빚게 했고, 설이면 한인타운 방앗간에서 직접 떡가래를 뽑아 떡국을 끓였다. 그뿐인가. 정월 대보름엔 부럼을 깠고, 동지엔 팥을 갈아 팥죽을 쒀 상에 올렸다.
“결국 가족들을 모이게 하는, 하나로 뭉치게 하는 힘은 밥상에서 나와요. 요즘 젊은 엄마들 보면 바쁘다고, 힘들다고 외식이 잦은데 정성껏 차린 밥상이야말로 자녀에게 해줄 수 있는 최고의 애정 표현이며 산 교육이 아닐까 싶어요. 그래서 요즘도 젊은 엄마들 만나면 늘 부엌이 훈훈해야 가정이 훈훈하다고 말해 주죠. 젊은 사람들에게 잔소리처럼 들릴지 몰라도 살다보면 정말 절감하게 될 겁니다.”
율리아씨의 이야기를 듣고 있노라니 혜진씨가 왜 행복하게 살고 있는지 그 비밀의 문이 스르르 열리는 순간이었다.
직장에서 만나 9년 열애 끝 결혼에 골인한 혜진씨 부부의 전통혼례 모습. 어쩐지 웃는 모습이 남매처럼 닮았다.
#한식의 세계화를 꿈꾸다
그렇게 어머니로부터 전수받은 혜진씨만의 요리법이 묶인 한식 요리책이 어느새 2권에 이르렀다. 이처럼 어머니에게 전수 받은 특별한 내공이 담겨 있다 보니 2권 모두 각종 요리전문 잡지나 출판계가 뽑은 ‘이 달의 베스트 쿠킹 북’에 올랐다고. 그녀가 처음 쓴 책인 ‘이팅 코리안’(Eating Korean) 역시 어느새 4쇄 인쇄에 이를 만큼 요리책 코너에서 스테디셀러로 자리잡았다.
또 그녀가 LA타임스에 기고한 돼지갈비며 오이 김치 등의 레서피 역시 매년 ‘올해의 베스트 레서피 탑 10’에 오를 만큼 상한가를 쳤다.
그러나 무엇보다 그녀 요리의 가장 열렬한 팬은 남편 팀 몰러니(42).
LACMA에서 근무하던 시절 만나 9년 열애 끝, 2001년 결혼에 이른 이 부부는 여전히 신혼 부부처럼 알콩달콩 산다. 애니메이션 제작자이며 대학 교수이기도 한 남편은 그녀가 만들어주는 한식에 푹 빠져 지금은 양념장을 직접 만드는 수준에 이르렀다. 특히 남편은 그녀의 요리 중 찜닭과 된장찌개를 가장 좋아한다고.
“요즘 혜진이 음식을 먹어보면 이젠 나보다 나아요. 얼마 전엔 맛본 불고기랑 고추장아찌는 정말 깜짝 놀랄만큼 경지에 이르렀지 싶어요. 하산 시킬려고요(웃음).”
세상 모든 어머니들의 흐뭇함과 기쁨이 한꺼번에 줄지어 총총히 지나가는 순간이다. 이보다 더 행복한 풍경을 우리가 알고 있었던가. 이보다 더 좋을 순 없다.
<글 이주현·사진 박상혁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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