며칠 전 LA의 윌셔 가를 운전할 때였다. 신호대기 중 무심코 옆을 보니 한 관공서 건물 화단에 노란 나리가 예쁘게 피어 있었다. 초록의 관목들 사이로 꽃대가 높이 솟아 눈길을 끌었다.
그때였다. 앞쪽에서 걸어오던 한인 할머니가 잔디밭을 가로질러 화단으로 갔다. 그러더니 봉오리들이 탐스러운 나리 줄기 두 대를 뚝- 꺾어 검정 플래스틱 봉지에 담는 것이었다. 아무 생각 없이 눈길을 주고 있던 나는 깜짝 놀라 가슴이 쿵- 내려앉는 것만 같았다. 할머니는 그저 무심히 가던 길을 갈 뿐이었다.
할머니의 돌출행동 하나를 두고 ‘민도’나 ‘준법정신’을 거론하는 것은 좀 호들갑스럽다. 할머니는 예쁜 꽃을 보자 젊은 시절 고향 들판에서 꽃을 꺾듯 무의식적으로 손이 갔을 수가 있다. 그런 경우를 감안한다 해도 한인들이 미국에 살면서 시민으로서 지켜야 할 공공규칙들에 너무 쉽게 눈을 감는 경향이 있는 것은 사실이다.
예를 들어 최근 남가주의 한인 4명은 전복채취 규정을 어겨 수만 달러의 벌금을 물게 되었다. 캘리포니아에서는 전복이 멸종위기를 맞으면서 4월부터 11월까지를 전복채취 시즌으로 정하고 한 시즌에 25개, 하루 서너 개로 채취량을 제한하고 있다. 이들 일행은 지난 해 북가주로 전복을 따러가서 62개를 채취했다가 단속반에 적발되어 이번에 재판을 받았다.
2년 전에는 한인 가족 5명이 몬트레이 카운티 해변에서 전복 95개를 채취했다가 1인당 1만5,000달러의 벌금형을 받은 적도 있다.
30-40년 전만해도 캘리포니아 해안에는 전복이 널려있었다. 70년대 이민 온 한인들은 주말이면 해변에 나가 바위마다 지천으로 널린 전복을 따서 바비큐해 먹는 것이 낙이었다고 한다. 그 많던 전복이 이제 남가주 해안에서는 사라지고 샌프란시스코 이북으로 올라가야 구경을 할 수가 있다. “한인들이 씨를 말렸다”고 농담을 하는 사람들도 있다.
조개가 많은 피스모 비치에서도 심심찮게 사고(?)가 난다. 조개를 아이스박스 몇 개에 꽉꽉 채워오다 적발되는 케이스들이다. 조개 채취 제한량은 50개인데 장사를 해도 될 만큼 싹쓸이를 하니 적발되고, 벌금 내며 망신을 당하는 것이다.
한인들이 좋아하는 것으로는 또 고사리를 빼놓을 수가 없다. 해마다 고사리 채취 시즌이면 산을 훑다시피 고사리를 따서 대형 쓰레기봉지에 몇 포대씩 담아오다 적발되곤 한다.
우리는 규정을 지키는 데 약한 걸까, 약하다면 왜 그럴까? 사회학자인 유의영 박사는 재래적 의식구조를 원인으로 꼽았다. 한국사회는 50년이 채 못 되는 짧은 기간에 후진사회에서 선진사회로 급격히 변했다. 하지만 사람의 정신이나 의식, 문화는 그렇게 빨리 바뀌지를 못해서 여전히 재래적 특성이 강하다는 것이다.
이성 보다는 정, 법이나 원칙 보다는 사람과 사람의 관계가 우선하는 사고방식이다. 그래서 “아무리 법이 그렇다 해도 우리 사이에 이럴 수 있느냐, 좋은 게 좋은 것 아니냐” 하는 말이 여전히 먹히고, “바닷가에 조개가 널렸는데 좀 가져가면 어때? 규정은 무슨 …” 하게 되는 것이다.
우리가 배고픈 시절을 벗어난 것이 불과 얼마 전이라는 사실을 지적하는 사람들도 있다. 한 의사는 이런 말을 했다. “컨퍼런스 같은 의사들 모임에 가보면 음식에 욕심내는 사람들이 있어요. 대개 한인들이나 동남아권 의사들이지요. 의사쯤 되면 먹고 살만할 텐 데도 가난했을 적 버릇을 못 버리는 것 같아요”
어린 시절 결핍감이 무의식에 남아 음식을 보면 일단 챙기게 되는 경향이 우리 속에 있는 가 보다. 전복이며 조개, 고사리를 마구 담게 되는 것도 의식 깊은 곳의 허기가 뿌리일지 모른다.
물론 단순히 규정을 몰라서 하는 실수도 많을 것이다. LA에서 낚시 캠핑 장비업소를 운영하는 이신범씨는 한인들만 유독 규정을 많이 어기는 게 아니라고 말한다. 미국 문화에 낯선 이민자들은 거의 모두 비슷한 실수를 한다는 것이다. 그래서 가주 수렵국은 조개나 전복 채취와 관련, 한글 안내문건도 마련해 두고 있다. 꼭 반갑지만은 않은 일이다.
한인들의 미국생활도 이제 연조가 꽤 깊다. 품위있는 미국 시민답게 준법정신이 몸에 밸 때도 되었다. 우리의 의식 밑바닥에 잠재하고 있는 어떤 충동, 성향, 혹은 허기와 같은 것들을 털어냈으면 한다. 그래서 한인들의 민도가 의심받는 일은 이제 없어야 하겠다.
권정희 논설위원
junghkwon@koreatime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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