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깥은 서늘하다. 저녁식사 후 남편은 유리 블라인드 창문을 반쯤 비틀어 열어두고 패밀리룸 책상에 앉아서 책을 읽고 있다. 어쩌다 한 번씩 말을 걸면 “지금 클라이막스야. 나한테 말 걸지마” 혹은 “조금 기다려, 지금 너무 재미있는 부문을 읽고 있어”라고 말한다. 새러 그루언의 ‘Water for Elephants’를 읽고 있다.
많은 점에서 서로 상이하지만 소설 읽기 취미는 남편과 일치한다. 영어 소설을 그는 영어로 읽고 나는 한글로 번역된 소설을 읽는 점이 다르다. 둘 다 문학의 장르 중 소설 읽기를 선호한다. 고전소설을 즐겨 읽는 편이다.
몇 년 전 겨울밤, 아이들의 영어교과서 ‘프랑켄슈타인’을 읽을 때는 딸과 함께 그 책을 읽었다. 딸과 남편은 “이 책은 영어로 읽어야 돼. 문체가 너무 아름다워. 어쩌면 이렇게 멋지게 표현할까. 한 편의 시와 같아. 한글로 번역된 것을 읽는 당신은 문체의 묘미를 못 느낄 거야”라고 말했다.
패밀리룸 활활 타오르는 장작불 옆에서 작설차를 큰 잔에 채우고 남편은 식탁 겸 책상인 테이블에서, 딸은 소파에서, 나는 바닥에 엎드려 누워 책읽기에 열중했던 모습이 떠오른다. 딸은 “이렇게 끝없이 책만 보면서 살면 얼마나 행복할까”라고 말했었다. 시인이자 소설가인 메리 셀리의 ‘프랑켄슈타인’을 세 사람이 동시에 재미있게 읽었다. 셋 다 작설차를 무척 좋아한다.
‘연금술사’ 등 파울로 코엘료 책은 남편이 먼저 영어로 된 책을 읽고 나에게 권했는지 아니면 내가 먼저 읽고 그가 읽었는지 잘 기억이 나지 않지만 서로 권하여 읽었다. ‘나사의 회전’ 등 헨리 제임스의 소설은 내가 먼저 읽고 그에게 권하여 그도 함께 읽었다. 잠자리 들기 전 산보시간에 함께 걸으며 읽고 있는 책의 내용을 조금씩 들려주는데 꽤 흥미로워 곧 ‘코끼리에게 물을’을 읽을 예정이다.
소설을 읽을 때 스토리의 전개보다 작가가 사물을 보는 관점에 유의하는 편이다. 주인공의 인물(인격) 묘사에 관심을 두며 작가가 그리는 이상적인 인격은 어떠한가 유심히 관찰한다. 그러면서 소설을 통한 작가의 인품과 성격을 유추해 보는 즐거움도 누린다. 책을 고를 때는 작품을 통하여 그 작가의 삶, 경험, 인품과의 새로운 만남을 기대하면서 고른다.
최근 읽은 헨리 제임스의 ‘아메리칸’은 지적이며 점잖은 신사, 전형적인 미국인 자수성가 부자인 크리스토퍼 뉴만과 우아하고 총명하고 기품 있는 유럽의 백작부인 클레어와의 사랑이야기였다. 신세계의 부유한 남자와 구세계 귀족 여성이 서로 사랑하지만 결국 이루지 못하는 과정을 감정을 절제한 가운데 담담하게 소상하게 마치 자잘한 벽돌로 고르게 한 채의 성곽을 쌓아올리듯 차근차근 서술한다.
몰락하여 빈털터리인 수백년 유서 깊은 가문의 딸이, 부자이고 신사이지만 미국의 근본 없는 장사치와 결혼하는 것을 결코 용납 못하는 가문의 자존심을 그린다. 유럽의 오랜 세월에 걸친 복잡한 전통(정서)과 미국 문화의 짧고 단순함이 빚는 문화적 차이를 드러낸다.
헨리 제임스의 소설 ‘아메리칸’이 나에게 말하는 것이 있다면 그것은 남자 주인공 뉴만의 절제하는 인품의 고상함에 대해서였다. 사랑도 절제하고 복수도 절제하고 이루지 못한 사랑의 슬픔으로 인한 감정의 낭비도 절제한다. 사랑하는 사람의 배반의 의지를 설득하는 것도 절제한다. 돌이킬 수 없는 손실을 입지만 침묵한다. 혼란스러운 파국 없이 세상은 지극히 평온을 유지한다. 이루지 못한 사랑의 아픔을 당사자들만 감내하고 방해꾼들의 혐오스런 모략에 대해 보복할 수 있는 그들의 약점을 쥐고 있지만 덮어버린다. 아메리칸인 뉴만의 넓은 아량을 보여준다.
백퍼센트 옳은 주장을 관철하지 않고 철회할 수 있는 용기는 소설 속에서만 가능할까. 져주는 것이 이기는 것인가. 저마다 자기가 옳다며 그 주장을 관철하고자 사력을 다하는 것이 미덕(?)인 시대에 한번쯤 깊이 생각해볼 만한 내용이었다.
어느새 오월이 다 가버렸다. 자카란다가 도처에 피어 도시를 한창 보랏빛으로 물들이고 있다. 아름답고 환하고 색색의 꽃들로 기쁨을 선사하는 오월의 자연과는 달리 핵무기, 군사제재 등 인간이 하는 짓거리에 대한 뉴스는 암울하기 짝이 없다. 뒤숭숭한 세상사를 비켜가기 위해, 때로는 정신을 가다듬는 한 방편으로 소설을 읽기도 한다.
윤선옥
동아서적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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