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머님의 80회 생신을 맞아 한국에서 친지들과 함께 축하 모임을 갖기로 했다. 시간을 맞추기 위해 마지막 기말시험 채점을 끝내자마자 한국행 비행기를 탔다. 열 명 정도의 승객이 마스크를 쓰고 있었던 것은 분명 돼지독감 때문이었으리라.
일본에서 비행기를 갈아타야 했는데 일본에 도착하기 바로 전, 우리 승객들은 비행기가 멈추어도 자리에서 꼼짝 말고 앉아 있으라는 승무원의 지시를 받았다. 비행기가 멈추자 유니폼을 입고 마스크를 쓴 일본 보건당국 관계자들이 예닐곱명 탔다. 그들은 승객 하나하나로부터 미리 작성케 한 자가 건강진단서를 받고 각 승객의 체온을 쟀다. 모두에게 이상이 없음을 확인한 후에야 우리는 비행기에서 내릴 수 있었다. 공항에 들어갈 땐 마스크 하나씩을 받았다.
덕분에 한국행 비행기 시간을 놓치고 말았다. 하지만 한국행 승객수가 많아서 비행기가 우리를 기다리고 있다는 얘기를 듣고 허둥지둥 입국신고를 마치고 출발 게이트를 향해 열심히 뛰었다. 비행기는 40분 늦게 일본공항을 이륙했다. 복잡했던 수속 때문에 온몸이 땀에 절어 있었지만 그들의 철두철미한 돼지감기 바이러스 봉쇄작전에 감탄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인천공항에선 일단 승객 모두를 내리게 했다. 그리곤 입국 신고대에 가기 전에 검문소를 세워 각 승객의 귀 체온을 잰 후 이상이 없으면 통과하게 했다. 그때엔 이미 제법 많은 사람들이 일본에서 받은 마스크를 쓰고 있었다.
도착 다음날 올림픽 공원 산책에 나섰다. 5월을 맞은 여린 초록의 공원은 시냇가를 따라 노랗게 핀 붓꽃으로 더욱 화사했다. 다만 산보하는 사람들의 대부분인 중년여성들이 얼굴에 쏟아지는 햇살을 막느라 하나 같이 얼굴 전체를 반투명 검은 챙으로 가린 모자를 쓰고 있어서 봄날의 화사함에 생채기를 내는 듯싶었다.
하지만 곧 더욱 희한한 사람들을 많이 만나게 되었다. 모자챙을 조금 올려 쓰긴 했지만 코와 입 부위에 각각 뚜껑이 달린, 안면 전체를 가린 대형 마스크를 쓴 사람들이었다. 그 모양이 참으로 섬뜩했다. 작년에 엘리베이터에 혼자 타고 있다가 그런 마스크를 쓴 사람이 불쑥 들어와 강도인줄 알고 기절할 뻔 했다는 남편의 말이 생각났다. 그런 사람들은 가는 공원마다에 많이도 있었다. 골프장에도 있다고 했다.
미국에서 한국 TV를 못 보다가 귀에 쏙쏙 들어오는 한국말 TV를 보니 처음 며칠은 열심히 보게 되었다. 그런데 그 많은 토크쇼와 프로그램들이 몸 관리, 피부 관리, 성형수술에 관한 것들이어서 놀라고 말았다. 심지어는 내과와 심장 전문의로 이름난 의사들을 초대한 토크 쇼에서 진행자가 오랜 시간 그들의 얼굴 생김새와 피부 관리를 연예인들과 비교하는가 하면, 의사 자신들조차 주름살을 없애기 위해 보톡스를 맞고 있다며 열심히 그리고 장시간 상세히 설명하는 것이었다.
어느 중년여성들의 동창모임에 갔을 때도 대화의 소재는 영락없이 얼굴, 몸매, 머리 등의 관리에 관한 것이었다. 대개 쌍까풀 수술을 했고, 눈썹, 아이라인 등을 문신했으며 레이저 피부시술을 받았다고 했다. 그 중 하나는 3일 전에 눈썹 밑을 잘라 눈 위의 주름을 없애는 수술을 했는데 집에 있기 답답해서 나왔다며 색안경을 살짝 들어 멍들고 퉁퉁 부은 눈을 보여 주었다. 마스크를 직접 쓰고 있진 않았지만 진짜 얼굴 모양의 마스크를 쓰고 있는 사람들만 같았다.
얼굴이 예쁘거나 잘 생기지 않으면 직장 잡기가 힘들다는 말을 사람들이 별 거부감 없이 하는 것도 믿을 수 없었다. 그래서 남자들도 성형수술을 많이 받는다고 했다. 확인한 바 없지만 조금은 그 말이 믿어졌던 건, 아까 지나쳤던 사람이 금방 옷을 갈아입고 또 다시 나를 지나치는 것만 같은 때가 많았기 때문이다. 특히 젊은 여성들 중. 눈 모양도, 코 모양도, 어쩜 그렇게 똑 같을까.
어제 TV에서 전통 가면극 송파산대 공연을 보았다. 문득 서울 길거리와 공원에 현대판 가면극이 벌어지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전통 가면극의 가면은 각 역할의 개성을 더욱 확실케 하기 위해 썼던 가면이지만, 현대판 서울 가면극의 가면은 각 역할의 개성을 없애기 위해 쓰는 가면이라고나 할까?
김보경/ 대학 강사·수필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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