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이가 들면서 자주 하게 되는 말이 있다. “큰 탈 없이 한평생을 산다는 게 얼마나 감사한 일인가”라는 말이다.
나이 들수록 삶에 탈이 생기는 경우들을 자주 보기 때문이다. 남보다 10년은 앞서 가는 듯 쌩쌩 잘 나가던 사람이 사고로, 혹은 질병으로 하루아침에 무너지고, 안하무인으로 떵떵거리던 사람이 다 큰 자녀를 잃고, 평생 잉꼬부부로 보이던 사람들이 느닷없이 이혼을 하는 등 불행이 숨바꼭질하듯 삶의 모퉁이에서 불쑥불쑥 튀어나온다. 그러니 하루하루를 별 일없이 무사하게 보내는 것이 얼마나 큰 축복인가.
1937년 하버드에서 보건소를 관장하던 알리 보크 박사는 이런 생각을 했다 - “의학 연구가 너무 아픈 사람들에게만 집중되어 있다. 질병과 증상 위주로 연구가 치중되다 보니 어떻게 하면 사람들이 행복하게 잘 살 수 있는 가 같은 연구는 너무 없다”
그래서 그가 시작한 것이 ‘그랜트 연구’였다. 심신 건강한 하버드 대학생들을 표본으로 하는 연구에 백화점 거부 W. T. 그랜트가 후원자로 나서면서 그의 이름이 붙여졌다. 연구를 위해 보크 박사는 하버드 학생들 중에서도 탁월한 ‘일등급’ 청년들을 골라냈다. 2학년 남학생들을 대상으로 학장 추천 하에 성적 우수하고, 신체 건강하며, 정서적으로 안정되고, 야심만만한 엘리트들 268명을 뽑아냈다.
그로부터 72년. ‘그랜트 연구’의 청년들은 90 즈음의 노인이 되었고 거의 절반은 세상을 떠났다. 그동안 연구 내용은 수시로 발표되어왔다. 그리고 며칠 전 월간지 애틀랜틱 6월호가 연구 전체를 아우르는 내용을 소개하면서 다시 주목을 받고 있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큰 탈 없이 한평생을 사는 것은 하버드 엘리트들에게도 쉬운 일이 아니다. ‘유복한 환경에 하버드 학벌’ 하면 보통 떠오르는 게 있다. 성공을 향해 10차선쯤으로 확 뚫린 탄탄대로이다. 실제로 ‘그랜트 연구’ 청년들 중 많은 수는 성공가도를 달렸다. 1960년대 40대가 되면서 대통령이 한명 나왔고(존 F. 케네디), 장관도 한명 나왔으며, 4명은 연방상원에 출마했고, 베스트셀러 작가, 뛰어난 언론인도 나왔다.
하지만 ‘탄탄대로’가 언제나 탄탄대로는 아니었다. 생애의 어느 시점에서 갑자기 끊어져 버리거나 밑이 빠져버리는 탈이 나는 것이었다. 예를 들면 다음의 케이스이다.
그는 방이 11개나 있는 대저택에서 유복하게 자랐다. 의사인 아버지와 예술적 기질의 어머니 슬하에서 유년기에 그는 행복했다고 말했었다. 하버드 재학 시절 그는 누구나 자기가 받은 달란트에 맞게 최선을 다해야 한다며 인생에 대해 의욕적이었다.
하지만 30대가 되면서 그는 흔들렸다. 부모와 세상에 대한 적대감을 뿜어내며 방황하더니 마약에 빠져들다가 40대 후반에 돌연 사망했다.
전혀 다른 케이스도 있다. 80대의 그는 지금 건강하고 부유하다. 인생을 다시 산다 해도 “아무 것도 바꾸고 싶지 않다”고 그는 말한다. 그의 삶이 완벽했던 것은 아니었다. 13살 때 어머니가 바람이 나서 가출을 했고, 2년 후 부모가 재결합했지만 싸움이 그치지를 않다가 결국 이혼했다. 대학생 때는 심한 교통사고 후유증으로 고통을 받기도 했고, 근년 아내가 암에 걸려 힘든 나날을 보내기도 했다. 하지만 그는 삶이 행복하다고 말한다.
무엇이 이런 차이를 만들어낼까. 1967년 이후 연구를 주도해온 조지 베일런트 박사는 성숙한 적응능력과 대인관계를 비결로 꼽는다. 인생에서 얼마나 어려움이 많은가 보다는 어려움에 어떻게 대처하느냐가 행복과 불행을 가른다는 것이다.
아울러 인생에서 단 하나 중요한 것을 꼽자면 사람과의 관계라고 그는 말한다. 앞의 케이스 중 전자는, 나중에 추적해보니, 부모로부터 받은 상처가 있었다. 강압적이고 냉담했던 아버지, 자신을 늘 못 마땅해 하던 어머니, 그리고 이혼으로 상처를 준 부모와 그는 끝내 화해를 하지 못했다. 반면 후자는 60여년 함께 살아온 아내, 그리고 자녀들과의 친밀한 관계가 어려운 상황들 속에서도 행복을 누리는 힘이 되었다고 한다.
베일런트 박사가 하버드 엘리트들을 42년간 지켜보고 내린 결론은 “행복의 열쇠는 관계”라는 것이다.
한평생 큰 탈 없이 살기는 어렵다. 하지만 탈이 생겨도 가족과의 관계가 탄탄하면 이겨낼 수가 있을 것이다. 가정의 달에 ‘그랜트 연구’의 의미를 새겨본다.
권정희 논설위원 junghkwon@koreatime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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