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도시에 있는 고등학교에 진학하기 위해 가족과 함께 살던 소읍을 떠났다. 입학식 며칠 전부터 눈물바람을 하시던 어머니는 보따리를 싸시기 시작하셨다. 이렇게 떠나면 다시는 내 품으로 돌아와 살 날이 없을 것이라며 중얼중얼 혼잣소리가 늘어갈수록 보따리의 수도 늘어갔다. 낮선 도시에 마련한 작은 자취방으로 그 보따리들이 이사했다. 어머니는 제일 먼저 시내 바느질집에서 얻어오신 자투리천으로 만든 꽃무늬 조각이불을 아랫목에 펴 놓으시고 구들이 제대로 덥혀지는지 자꾸 손을 넣어 보셨다. 한달치의 연탄과 문 손잡이보다 더 커보이는 자물통을 사오시고 소꿉같은 살림들의 자리를 정해 주셨다. 풀어낸 보자기들을 모아 다시 허수룩한 보따리 하나를 만들어 베개 삼아 누우신 어머니는 늦도록 잠 들지 못하셨다. 학교에서 돌아와 어머니의 부재를 느끼며 방문을 여니 아침까지 맨유리창이던 쪽창에 세상에서 가장 작을 것 같은 커튼이 쳐져 있다. 밤새 골목으로 난 손바닥만한 창이 신경쓰이신다며 아예 여닫지 못하게 못질을 하시더니 떠나시기 전에 즉흥적으로 만들어 달으신 듯했다. 조각이불 만들고 남은 천으로 만드셨던 보자기 하나를 뜯어 손바느질로 주름잡아 만드신 커튼은 촌스러웠지만 저녁해가 넘어갈 때 쯤이면 세상에서 가장 따뜻한 색깔의 커튼이 되었다. 가끔 주홍색 노을에 취한 커튼 속의 작은 꽃들이 도망나와 나의 방은 꿈 꾸는 방이 되기도 했다.
차려 놓고 가신 반찬이 목울대에 걸려 넘어가지 않았다. 깔아 놓은 이불 속에 발을 담그니 눈물이 툼벙툼벙 떨어졌다. 혼자 눕는 자취방은 무섭도록 적막했다. 주인집 식구들 떠드는 소리와 창문 밑 골목을 지나가는 사람들의 발자국 소리만이 터무니없이 크게 들려왔다. 그 밤 기차는 달가닥달가닥 내 잠을 동강내며 간간이 지나갔고 돌아누울 적마다 마른 볼이 쓰리도록 눈물이 흘렀다.
두어 달에 한번씩 집으로 내려가서 하룻밤 자고 떠나려면 마루엔 어김없이 보따리들이 싸여져 있었다. 시간이 지나도 어머니의 보따리는, 보따리를 실어주고 차창 밖으로 서계시던 어머니의 모습은 여전히 촌스러웠다. 도시는 낮설은 불빛들로 가득했고 세상에서 가장 작은 커튼이 쳐져 있던 그 방에서 어머니가 싸주신 보따리를 풀며 후두둑 떨어지던 눈물도 여전했다. 어머니의 보따리엔 어머니를 닮은 초라하고 따뜻한 것들이 들어 있었다. 비 묻은 바람이 부는 날에도 작은 유리창으로 저녁눈이 싸르락거리며 부딪는 날에도 그 보따리 사랑이 있어 나의 남은 키는 자랄 수 있었고 또 꿈꿀 수 있었다. 보따리는 어머니의 마음이었고 딸에게 건네는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 어머니만의 언어였다.
언제부턴가 새벽에 전화가 울리면 더럭 겁이 난다. 얼마 전 이른 아침에 걸려온 동생의 전화가 그랬다. 두번째로 쓰러지신 어머니는 한방병원 집중치료실로 옮겨지셨고 발음이 너무 어눌해져 무슨 말씀을 하시는지 도통 알아들을 수가 없었다. 오십 해를 넘겨 살면서 깨달은 것이 있다면 별로 중요하지 않은 일 열 가지에 매달리기보다는 한 가지 중요한 일을 놓치지 말자는 것이었다. 붙잡는 현실의 손들을 뿌리치며 서둘러 공항으로 갔다.
어머니는 평생을 기약하며 자식을 키우셨지만 내가 어머니께 기약할 수 있는 시간은 보름 남짓이었다. 한방병원의 갇혀 있는 시간은 또 나름대로 빠르게 지나 다시 떠나와야 할 아침이 되었다. 이른 아침 병실문을 열자 눈길이 마주친 어머니는 간병인부터 부르신다. 손짓으로 챙겨온 큼지막한 보따리엔 시골 지인들이 문병길에 가져온 깐 밤과 반시곶감, 똥을 빼낸 볶음용 멸치와 들기름, 말린 서대, 고춧가루, 초봄에 캐온 쑥으로 만든 떡반죽에 병원 앞 모퉁이길에서 팔던 쌀티밥까지 한 봉지 들어 있다. 수족을 쓰지 않고도 맏딸이 좋아하는 것만 모아 보따리를 싸실 수 있는 어머니는 보따리 싸기의 달인 같았다. 통관이 염려되었지만 어머니의 보따리는 냉큼 받아드는 것만이 최상의 보답이었다. 어머니는 눈을 마주치지 않은 채 빨리 가라고 성한 한쪽 손을 내두르시며 딸을 밀어내신다. 언제나 어머니의 이별법은 보따리와 손짓이었다.
밀려나듯 병실을 나온 나는 이른 아침의 서울 거리, 그 낮선 부산함을 눈물로 뿌옇게 지워가며 어수선한 공항에 닿았다. 얼린 떡반죽과 쌀티밥을 차마 수하물로 처리할 수 없어 어깨가방에 넣어 곁에 두고 왔다. 한국을 떠나올 때마다 겪는 감정이지만 비행기의 이륙을 느끼며, 작아지는 한국의 풍경을 내려다보면 괜한 서러움이 가슴에 맺힌다. 언제 다시 뵐 수 있을지 모르는 어머니를 두고, 마지막이 될지도 모르는 어머니의 선물 보따리를 안고 오는 이번 길은 더욱 그랬다. 보따리와 함께 무사히 미국에 안착하여 도착인사를 하니 어머니는 통역사인 간병인을 통해 먼저 보따리의 안부부터 물으셨다.
뉴욕에서 대학을 다니는 딸아이가 온다는 전화를 받고 이번엔 무얼 해주나 궁리하다가 문득 냉동실의 그 쑥반죽이 생각났다. 먼 하늘길을 왔다 갈 딸을 위해 만들어 주신 쑥반죽을 꺼내어 나 또한 멀리서 오는 나의 딸을 먹이려고 반달같은 송편을 만들었다. 내가 그랬듯이 아이도 이제 내 품으로 돌아와 살 날은 없을 것이다. 어머니의 혼잣소리는 늘 세상 사는 이치였다. 진리이기도 했다.
일요일 오후, 아이가 떠난다. 늘 배웅해주는 큰아이의 차가 뒷걸음질 치는데 문득 쑥송편이 생각났다. 이른 저녁을 먹고 떠나는 아이의 가방에 떡을 넣어주며 밤에 출출하면 먹으라고 당부한다. 그 옛날 어머니처럼.
차가 보이지 않을 때까지 손을 흔든다. 맞은편 숲으로 저녁해가 떨어지고 있다. 빛날수록 나를 더욱 외롭게 했던 불빛들이 살고 있는 도시로 가는 아이, 그 달가닥거리던 기차를 타고 떠나는 아이, 아이도 그 불빛을 보며 외로움을 느낄까. 외롭고 서러울 때마다 자꾸 높이를 올려보던 꿈꾸는 사다리는 가지고 있을까. 주방으로 들어서니 소쿠리 안에 알맞게 말랑해진 쑥송편이 아직 몇 개 남아 있다. 어둑해지는 창밖을 느끼며 이층으로 오르는데 가슴에 서러움이 쑥덩이처럼 얹친다. 먼지 나던 작은 차부, 언제까지나 돌아서지 않고 종이처럼 허적하게 서계시던 어머니가 보인다. 그 어머니가 평생 내게 싸주셨던 보따리들이 보인다. 짐짓 밀어내고 싶었던 적도 있었던 그 숱한 보따리들을 풀으며 그때는 몰랐었다. 어머니의 삶이 얼마나 아득바득한 것이었으며 또 위태롭기도 한 것이었는지. 가끔은 어머니의 삶에도 팔뚝에 돋는 소름처럼 한속드는 시간들이 지나고 있었다는 것을…….. 그때는 몰랐었다.
어머니의 바다엔 이제 석양이 내리고 있다. 고단한 시간들이 출렁이고 지나간 자리, 더는 건져올릴 것이 없는 저무는 바다에서 어머니는 무얼 하고 계실까. 아니, 또 어떤 보따리를 싸시고 계실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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