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에서 가장 수명이 짧은 자리가 있다면 그건 영웅이라는 자리”라고 윌 로저스는 말했다. 1920년대와 30년대 미국의 인기 배우이자 칼럼니스트였던 그는 촌철살인의 시사 유머로 지금도 자주 인용된다.
또 한사람의 영웅이 추락했다. 노무현 전 대통령이 포괄적 뇌물 수수혐의로 검찰조사를 받기 위해 집을 나서면서 국민들 앞에 머리를 숙였다. “면목 없습니다. 실망시켜 드려서 죄송합니다”
이로써 2002년 12월 대선 승리와 함께 영웅으로 떠올랐던 그는 영웅으로서의 수명을 다했다.
모든 관계는 우연에서 시작된다. 우연히도 같은 시간에 같은 공간에 있게 된 것이 만남을 만들고, 만남이 지속적 관계로 이어질 때 우연은 인연으로 이해된다. 명예에 대한 욕망이 남달리 커보였던 노 전 대통령이 지금 불명예의 진창 속에서 초라한 것도 이런 우연, 혹은 인연이 그 시작이었다.
노 전 대통령의 ‘포괄적 뇌물 수수’ 혐의는 이전의 여러 대통령 일가의 뇌물 수수 케이스와 뚜렷이 구별되는 점이 있다. 대통령직이 갖는 절대적 권력에 기대 여기저기서 돈을 받은 이전 케이스들과 달리 단 한사람 후원자와의 20년 인연에 기대 돈을 받았다는 사실이다. 그의 정치 야망 실현에 윤활유 역할을 해줬던 인연이 이제 덫이 되어 그의 발목을 잡았다.
인연을 억겁의 시간의 산정에서 바라보라고 불교는 가르친다. 등산을 가보면 산속에서는 산을 볼 수가 없다. 어느 길 어디쯤을 가는 지도 모르는 채 숨을 헐떡이며 발걸음을 옮길 뿐이다. 그러다가 산을 다 올라 산정에서 내려다보면 길이 보인다. 산을 오르는 사람들이 무엇을 거쳐 어디로 향하는지 전후좌우가 다 보인다.
우리가 살아가면서 마주치는 무수한 인연들도 시간의 산정에서 내려다보면 길이 있다는 것이다. 그 인연의 길을 따라 500겁에 한번 옷깃을 스치고, 1,000겁에 한번 같은 나라에서 태어난다고 한다. 부부가 되고, 형제자매가 되며, 친구가 되고, 연인이 되는, 그도 아니면 같은 학교에 다니고, 같은 직장에 다니는 인연은 수천 겁에 한번 올까 말까한 기적 같은 일, 그러니 인연을 소중히 여기라고 불교는 가르친다.
삶은 인연의 농사라고 말할 수도 있겠다. 굳이 불교의 시각을 빌리지 않아도 만남은 신비롭다. 모래알처럼 많은 사람들 중에서 어떻게 하필 ‘너’와 ‘내’가 만났는지는 불가해하다. 우리가 선택할 수 있는 영역 밖의 일이다. 하지만 우연처럼 시작된 인연을 어떻게 키워내느냐는 전적으로 우리의 몫이다. 인연의 경작이다.
1900년 즈음 스코틀랜드의 한 시골. 가난한 농부의 아들이 어느 날 익사 직전의 한 소년을 구했다. 물에 빠졌던 소년은 휴가차 시골에 놀러왔던 귀족 가문의 자제였다. 두 사람의 만남은 이렇게 우연히 시작되었다.
다음날 농부의 집으로 점잖은 신사가 찾아왔다. 신사는 “아들을 구해줘서 고맙다”며 농부의 아들에게 보답을 하고 싶어 했다. 신사는 소년에게 무엇이 되고 싶은 지를 물었다. 농부가 되는 것 외에 다른 걸 생각해본 적 없던 소년은 곰곰이 생각한 끝에 의사가 되고 싶다고 했다. 신사의 지원으로 소년은 공부를 했고 의사가 되었다.
그리고 수십 년이 지난 1943년 2차 대전 중. 윈스턴 처칠 영국 수상이 북 아프리카를 방문 중 폐렴에 걸렸다. 그가 위독하다는 소식을 듣고 한 의사가 급히 달려갔다. 페니실린을 발견한 알렉산더 플레밍이었다. 그의 페니실린 덕분에 처칠은 목숨을 건질 수가 있었다. 플레밍으로서는 두 번째 그의 생명을 구한 것이었다. 소년 시절 맺어진 인연을 선하게 가꿈으로써 평생 서로가 서로에게 복이 된 케이스이다.
노 전 대통령과 박연차 회장의 인연 역시 시작은 우연이었다. 노건평씨가 세무공무원으로 있던 지역에서 우연히도 박 회장이 사업을 시작한 것이 계기가 되었다. 그리고는 “친구 동생이 정치한다고 해” 후원을 하면서 두 사람은 인연을 맺었다. 그러나 ‘돈’과 ‘권력’의 인연에는 한계가 있다. 탐욕이 끼어들기 마련이고 그 순간 인연은 변질된다.
인연은 우리 삶을 지탱하는 존재의 닻이 될 수도 있고, 존재를 허무는 덫이 될 수도 있다. 석가탄신일을 맞아 아득한 인연의 길들을 더듬어 본다. 복이란 인연에 대한 성실함에서 나오는 것 같다.
권정희 논설위원
junghkwon@koreatime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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