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이들이 커가면서 온 식구 식탁에 같이 앉는 일이 드물다. 저녁식사는 꼭 같이 하기로 한 약속에 슬며시 금이 가기 시작한 지 오래다. 다섯 식구가 나누던 식탁이 넷이 되고 셋이 되어 단촐하게 앉아 식사하는 일이 잦아졌다. 비어 있는 자리의 아쉬움보다는 지금은 셋이 둘이 되기 전까지의 저녁식사를 즐겨야 되는 수순인지도 모른다.
내 어릴 적의 밥은 곧 질서였다. 부엌의 솥전에서 풀 때부터 할아버지의 밥이 먼저였고 할머니 아버지 순으로 퍼내려갔던 밥은 하얀 쌀도 그 순서대로 섞여 있었다. 당연히 할아버지가 먼저 수저를 드셔야 나머지 식구들의 수저도 움직였다. 없는 반찬이었지만 어른들의 밥상에 놓인 것은 담긴 그릇의 모양새라도 달랐다. 난 보리를 싫어했다. 아주 어릴 때부터 입 안의 쌀은 용케도 넘기고 보리는 밀어냈다. 보리밥이 싫어 수저를 놓는 딸이 마음에 걸려 내 밥사발 밑바닥에 하얀 쌀밥을 숨겨 놓으시던 어머니, 그것은 어머니와 내가 만든 최초의 비밀 같은 것이었다.
그 밥을 짓던 부엌은 어머니와의 추억이 있는 장소이기도 하다. 낮이 지고 어둠이 내려올 즈음이면 어린 나는 괜히 마음이 쌉싸름해지면서 부엌간의 어머니를 찾았다. 가마솥에 쌀을 안치고 불을 때고 계신 어머니 곁에 앉으면 따스했다. 부엌 한켠엔 칡넝쿨로 허리가 동여져 있는 마른 나뭇단들이 가득했다. 소나무 싸리나무 참나무 노간주나무, 잘 마른 나무들은 아궁이 가득 기세 좋은 불너울을 만들었다. 타는 나무들에게선 향기가 났다. 산꽃을 피게도 하고 지게도 하던 숲의 향기가 났다. 무릎이 따스해지고 볼이 바알개진 나는 쪼그리고 앉아 부지깽이로 장난을 쳤다. 벼짚단이나 보릿대를 땔 때면 군데군데 남아 있던 쌀이나 보리알들이 순간처럼 하얗게 터지면서 튀밥 같은 꽃을 만들었다. 나는 그 티밥꽃의 유혹에 긴 부지깽이로 자꾸만 지푸라기를 아궁이에 밀어넣었다. 어머니는 아까운 밥이 탄다고 불 붙은 부지깽이를 빼앗아 구정물통에 담갔다 뺐다. 치직거리며 불씨가 구정물 속으로 사라지고 하루 저녁치의 키가 작아진 부지깽이는 부엌간의 한쪽에 세워졌다.
가마솥이 밥눈물을 흘릴 즈음 어머니는 굳은 떡이나 계란찜 같은 걸 솥 가장자리로 밀어 넣으셨다. 나는 잔치 끝에 남은 시루떡이나 언 물두멍에 간수했던 흰 가래떡이 부드러워지기를 기다리며 아궁이로 바짝 다가앉았다. 도독 도도도독 밥이 자쳐지는 소리가 나면 어머니는 부지깽이로 불땀을 다독이셨다. 울퉁불퉁하지만 반지르르 윤이 나있는 부엌 흙바닥에 어머니가 밥상을 차리는 동안 나는 바알개진 볼을 손바닥으로 가리고 앉아 아궁이 속에 남은 잔불이 꺼져가기를 기다렸다. 하얀 김을 내며 가마솥 뚜껑이 열리기를 기다렸다. 어머니는 내 작은 손에 찹쌀 향기 싸릿한 찹쌀떡이나 보들보들해진 가래떡을 한 토막 끊어 주셨다. 그런 주전부리가 없는 날이면 어머니는 밥상에 반찬을 차려놓으신 뒤 다시 아궁이 앞에 앉으셨다. 꺼져가는 잿더미를 헤집고 남아 있는 불씨 안으로 잘 마른 솔가지 하나를 던져 넣으셨다. 잔별처럼 남아 있던 불씨더미 안으로 던져진 솔가지는 화라락 다시 불꽃을 일으키고 밥은 처음에 자쳐질 때처럼 토독 토도도독 소리를 내며 되자쳐졌다. 그런 날은 식구들의 밥을 다 퍼 담고 나면 솥바닥에 샛노란 누룽지가 보였다. 솔가지 하나로 누룽지를 만드시는 어머니는 요술장이였다. 어머니는 대나무 채반만한 누룽지에 칼집을 십자로 낸 다음 한쪽을 떼내어 내 손에 들려 주셨다. 보리밥도 누룽지가 되면 고소해졌다. 씹을수록 단맛이 났다.
먼 샘에서 물을 길어와 쌀을 씻고, 두터운 솥을 덥혀 밥을 짓고 또 부뚜막 작은 솥에 국이나 나물 같은 반찬을 삶고 익히는 부엌 일은 느리고도 힘들어 보였다. 삼동의 부엌간은 추웠지만 불 앞에 앉으면 따뜻했다. 불너울에 비친 어머니의 옆모습은 곱고 아늑했다. 곁에 쪼그리고 앉아 있으면 덤으로 얻어지는 게 있어 좋았던 어머니의 부엌간, 어머니는 매운 시집살이에 저녁새처럼 날아 들어와 재잘대는 어린 딸이 있어 좋았다 하셨다.
내 손에 들려주고 남은 누룽지는 눌은밥과 숭늉이 되었다. 숭늉 마신 그릇을 내려놓으시며 하시는 할아버지 말씀은 언제나 똑같았다. 밥티끼 하나도 버리지 마라. 밥을 소중히 여겨야 한다. 밥 앞에서 공손해야 한다. 밥 한술이 입으로 들어가기까지 아흔 아홉 번의 수고를 하는 사람에게 감사하며 먹어라. 그 할아버지는 일생을 논에 엎드려 사셨고 종잇장처럼 얇아진 몸이 쓰러진 곳도 그 논둑이었다. 콩꽃이 피기 시작한 논둑에서 쓰러지신 할아버지는 다시 일어나시지 못했다. 고슬고슬한 밥 앞에 앉으면 가끔 할아버지 생각이 난다.
밥을 짓는 일도 같이 앉아 나누는 일도 시들해진 이유는 뭘까. 밥 말고도 먹거리가 많아진 이유일 것이고 밥 먹는 일보다 더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일이 많이 생긴 까닭일 것이다. 초등학교 때는 도시락을 싸오지 못하는 친구들이 더러 있었다. 대신 그 친구의 책상 속에는 꾸둑꾸둑한 누룽지가 신문이나 시험지에 동그랗게 싸여 있었다. 도시락을 싸오는 친구들의 밥 속에도 밥티가 잔뜩 묻어 있는 감자나 고구마가 들어 있기도 했다. 하얀 쌀밥은 곧 행복이었는데 이제 더 이상 사람들은 밥사발에서 행복을 찾지 않는다.
밥은 사람의 관계를 부드럽게 해준다. 밥 한 끼 나누자는 말은 정감 있다. 약속만으로도 한 끼의 밥으로 서로가 돈독해질 조짐이 느껴진다. 우리가 어릴 적에는 밥을 자주 나누었다. 무슨 날이 되면 동네 어른들을 잔칫상에 초대하는 입심부름을 했던 기억이 난다. 부엌간이 바빠지고 덩달아 신이 난 나는 입심부름이 즐거워 팔랑팔랑 뛰어다녔다. 초봄의 어귀가 되면 할아버지의 생신날이 되었다. 그날은 나뭇가지에 잠들어 있던 새들도 일찍 깨어 아직은 차가운 아침 공기 속을 부산하게 날아다녔다. 나는 동생과 동편 서편으로 나누어 누가 먼저 심부름을 끝내나 내기를 했다. “진지 잡수러 오시래요” 누구네 잔칫날이 언제쯤인지 꿰뚫고 계신 어른들의 대답은 들을 필요도 없다. 고장난 녹음기처럼 똑같은 말을 열린 대문 안으로 외쳐 넣고 폴짝폴짝 대문간을 넘는다. 할머니 혼자서 외롭게 사시는 꼬작집을 끝으로 신발이 벗겨지게 집으로 뛰어가면 늘 먼저 도착한 동생이 토방 위에 서 있었다. 하악하악 가쁜 숨을 몰아쉬는 나를 약올리던 두 살 아래 남동생이 그때는 참으로 얄미웠다. 멀건 소고기국에 하얀 쌀밥, 그리고 통팥을 켜켜이 넣은 찹쌀시루떡이 전부인 생신상이었지만 어른들은 부지런히 수저소리를 내시며 행복한 아침상을 드셨다.
발품을 팔며 이집 저집으로 진지 잡수러 오시라고 외치던 그 고향에도 봄이 왔을 것이다. 겨우내 얼었던 흙이 부드럽게 살을 풀고 냇물은 맑은 첫소리를 내며 흘러가고 대문간엔 연분홍 복사꽃 그늘이 내려앉아 있을 것이다.
고향에 가고 싶다. 숲이 통째로 타는 듯 저녁연기 향기롭던 그 아궁이 앞에 앉아보고 싶다. 호박꽃같은 등불 아래 하얀 쌀밥을 호호 불며 먹던 행복한 저녁밥상에 다시 앉아보고 싶다.
저녁비가 내린다. 낮선 어둠과 함께 내리는 빗소리는 토독 토도도독, 어머니의 밥 자치는 소리와 닮았다. 빗소리는 저녁내 지붕을 때리고 가슴엔 맘 먹고 눌러 담은 가난한 집의 밥사발같은 그리움만 묵지근하다.
댓글 안에 당신의 성숙함도 담아 주세요.
'오늘의 한마디'는 기사에 대하여 자신의 생각을 말하고 남의 생각을 들으며 서로 다양한 의견을 나누는 공간입니다. 그러나 간혹 불건전한 내용을 올리시는 분들이 계셔서 건전한 인터넷문화 정착을 위해 아래와 같은 운영원칙을 적용합니다.
자체 모니터링을 통해 아래에 해당하는 내용이 포함된 댓글이 발견되면 예고없이 삭제 조치를 하겠습니다.
불건전한 댓글을 올리거나, 이름에 비속어 및 상대방의 불쾌감을 주는 단어를 사용, 유명인 또는 특정 일반인을 사칭하는 경우 이용에 대한 차단 제재를 받을 수 있습니다. 차단될 경우, 일주일간 댓글을 달수 없게 됩니다.
명예훼손, 개인정보 유출, 욕설 등 법률에 위반되는 댓글은 관계 법령에 의거 민형사상 처벌을 받을 수 있으니 이용에 주의를 부탁드립니다.
Close
x