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해 말 남가주의 한 한인은행 직원들이 고객들의 돈을 빼돌려 쓰다 탄로가 난 사건이 있었다. 지점의 책임자급 간부가 다른 직원들과 짜고 상당한 현금을 꺼내 썼다고 해서 한동안 말거리가 되었다. 한인들이 모인 자리마다 그 사건이 도마 위에 올랐는데 그때 많은 사람들이 이해할 수 없던 부분이 있었다.
은행원들이 고객의 안전금고에서 돈을 꺼냈다고 하는 데, 고객이 열쇠를 가지고 있는 안전금고를 제3자가 어떻게 열수 있느냐는 것이었다. 며칠 전 우연히 그 해답을 듣게 되었다. 타주나 해외에 사는 고객들은 열쇠를 은행원에게 맡겨 놓는 경우가 꽤 있다는 것이다. 열쇠를 맡겨놓으면 잊어버리거나 잃어버릴 염려도 없고, 갑자기 돈을 꺼내야 할 때 은행원에게 부탁할 수 있으니 편하기 때문이다.
열쇠를 맡긴다는 것은 전적인 신뢰의 표시다. 고객은 그 직원을 믿을만하다고 판단해서 열쇠를 맡겼는데, 결과적으로 고양이에게 생선가게를 맡긴 격이 된 것이다.
세상사의 구구절절한 사연들은, 아주 단순화하면, 열쇠를 맡길 때와 돌려받을 때의 차이에서 비롯된다. 처음 열쇠를 맡길 때는 신뢰와 사랑이던 것이 열쇠를 돌려받는 시점에는 배신과 증오로 바뀌는 경우가 다반사다. 마음의 열쇠를 맡겼던 사람은 변심을 하고, 금고의 열쇠를 맡겼던 사람은 돈을 빼돌리니 세상이 조용할 날이 없다.
금고 치고는 가장 큰 금고, 나라살림의 열쇠를 맡았던 대통령이 또 다시 망신을 당하고 있다. 한국의 노무현 전 대통령이 민망한 처지가 되었다. 행동은 투박하고 말은 거칠지만 ‘사심은 없을 것 같다’는 믿음에 국가통치의 열쇠를 맡겼던 국민들은 지금 배신감으로 허탈하다. 그가 자신의 권력유지와 어떤 개인적 필요를 위해 그 열쇠를 쓴 듯한 정황들이 드러나고 있기 때문이다.
노 전 대통령은 억울할 수도 있다. 청와대에서 ‘돈 필요하다’고 눈짓만 하면 대기업들이 알아서 챙겨오던 것이 불과 얼마 전이고, 이전 대통령들의 비자금은 수천억대에 달했는데, 집에서 10억 빌려 쓴 걸 이렇게 문제 삼는 건 ‘정치보복’이라고 느낄 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털어도 먼지 안 날듯 풀이 빳빳하던 사람에게서 먼지가 났으니 실망이 큰 것이다. 문제의 돈을 보는 검찰의 시각이 진실과 다를 수 있다고 설명에 나선 순간 그는 궁색한 모습이 되었다.
깊은 숲속에 가보면 수백년은 되었을 아름드리나무들이 쓰러져있다. 그 고목의 껍질을 벗겨보면 예외 없이 벌레들이 떼 지어 있다. 흰개미들이다. 오랜 세월 폭풍우나 벼락에도 끄떡없던 거목들을 쓰러트리는 것은 몸집 큰 코끼리나 사나운 사자가 아니다. 낟알만한 곤충이다. 흰개미 한 마리가 와서 밑둥치를 쏠기 시작하면 뒤이어 개미들이 떼로 몰려와 나무를 쏠아먹으며 속으로 파고들어간다. 그러다가 속이 너무 파여 물을 빨아올릴 수가 없게 되면 나무는 죽는 것이다.
“시작은 미약하나 나중은 창대하리라”는 욥기 구절은 잘못·죄에 관한한 거의 예외가 없다. 흰개미 한 마리로 비롯된 미약한 시작이 거목을 쓰러트리는 창대한 결과를 낳듯 공금유용도 직권남용도 시작은 미약하다. 처음부터 남의 금고 열고 돈을 꺼내 써야지, 뇌물 받아 축재해야지 하고 작정하는 사람은 거의 없다.
급전이 필요해 “잠깐 쓰고 돌려놓자”며 손을 댄 것이 “한번만 더, 딱 한번만 더” 하다 보면 남의 돈을 내 돈처럼 쓰는 도덕불감증이 된다. 금융계의 존경받는 인사였다가 폰지 사기범으로 정체가 드러난 버나드 메이도프도 처음부터 사기를 칠 의도는 아니었을 것이다. 고객들과의 약속을 지키고 싶은 마음에 편법을 쓴 것이 수십년 500억달러 사기의 시작이 되었을 수가 있다.
중요한 것은 원칙이다. ‘열쇠’를 맡은 후 원칙을 얼마나 잘 지켰느냐에 따라 열쇠를 돌려줄 때 웃을 수도 있고 울 수도 있다. 피치 못할 사정 때문에, 욕심 때문에, 유혹을 못 이겨 … 원칙에 한번 눈을 질끈 감으면 그것이 바로 ‘흰개미’가 된다. ‘흰개미’가 줄지어 몰려들면서 위풍당당하던 사람을 속으로부터 갉아먹어 쓰러트리는 수가 있다. 패가망신이다.
인생의 지혜란 경계를 소홀히 하지 않는 단정한 마음가짐이다. 흰개미가 꼬여들지 않도록 마음의 밑둥치를 잘 살피는 것이다.
권정희 논설위원 junghkwon@koreatimes.com
댓글 안에 당신의 성숙함도 담아 주세요.
'오늘의 한마디'는 기사에 대하여 자신의 생각을 말하고 남의 생각을 들으며 서로 다양한 의견을 나누는 공간입니다. 그러나 간혹 불건전한 내용을 올리시는 분들이 계셔서 건전한 인터넷문화 정착을 위해 아래와 같은 운영원칙을 적용합니다.
자체 모니터링을 통해 아래에 해당하는 내용이 포함된 댓글이 발견되면 예고없이 삭제 조치를 하겠습니다.
불건전한 댓글을 올리거나, 이름에 비속어 및 상대방의 불쾌감을 주는 단어를 사용, 유명인 또는 특정 일반인을 사칭하는 경우 이용에 대한 차단 제재를 받을 수 있습니다. 차단될 경우, 일주일간 댓글을 달수 없게 됩니다.
명예훼손, 개인정보 유출, 욕설 등 법률에 위반되는 댓글은 관계 법령에 의거 민형사상 처벌을 받을 수 있으니 이용에 주의를 부탁드립니다.
Close
x