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려나무(Palm Tree)는 성경에 많이 나오는 중요한 식물 중의 하나다. 종려나무는 승리와 기쁨, 그리고 건강함과 생명의 상징으로 사용되었다.
신약성경에서 예수님이 예루살렘으로 입성한 사건은 유대인들에게는 가장 흥분된 사건이었다. 예수님은 나귀를 타시고 예루살렘으로 입성하셨는데 그 때 유대인들은 자기들의 겉옷을 그 나귀위에 얹고, 예수님이 들어가시는 길에 카페트처럼 길게 깔아 드렸다. 줄지어 늘어선 무리들은 예수님의 뒤를 따라가며 손에 종려나무가지를 들고 소리를 지르며 찬송했다. “호산나 다윗의 자손이여 찬송하리로다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이여 가장 높은 곳에서 호산나 하더라”(마태복음21:9)
이렇게 예수님의 예루살렘 입성을 화려하게 환영한 유대인들은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는 일에 적극적으로 가담하고 환영하였다. 그들은 두 개의 얼굴을 가진 사람이었고, 야고보 선생이 지적한 대로 한 입으로 찬송과 저주를 내는 연약한 인간의 모습을 그대로 보여주었다. 그들이 흔든 종려나무 가지는 십자가 앞에서 땅에 던져져서 빛을 바래고 말았다.
유대인들에게 자신들의 삶을 변화시켜 줄 구원자, 메시야(Messiah)를 500년 이상 기다려 왔다. 다윗왕 시절에 번창했던 그 때의 시절을 회고하면서 바벨론에게 포로로 끌려갔던 70년의 기간, 그리고 그리스(헬라), 로마의 지배를 당했던 그 고난의 시간 속에서도 이스라엘을 회복시켜 줄 새로운 왕이 올 것이라고 구약의 예언서에게 예언한 말씀을 믿고 참으며 기다렸다.
유대인들은 예수님이 공생애 사역을 시작한지 3년 동안 지켜보면서 바로 그 예수님이 이스라엘을 회복시켜 줄 구원자로서 인정하였다. 그래서 예수님이 예루살렘으로 입성할 때 큰 환영인파가 몰려들었던 것이다.
그러나 그들은 예수님이 유대인의 왕이었지만 나귀를 타신 왕인 것을 몰랐다. 왕이 나귀를 탄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나귀는 평범한 서민들이 교통수단으로 타고 다니는 것이었다. 정말 예수님이 그들이 기대했던 왕이었다면 큰 말 그 중에서도 흰 말을 탔을 것이다. 나귀를 타신 것은 곧 그들이 생각했던 권력과 힘을 지닌 세상적 군왕이 아니라 사람들과 같이 되어 사람을 구원하러 오신 겸손한 왕임을 보여 준 것이다.
우리 신앙은 때로 예수님의 실상(實像)보다는 허상(虛像)을 품고 있다는 것이다. 신앙은 높은 곳에 있지 않고, 배부른 곳에 있지 않으며, 따뜻한 곳에 있지 않다. 설령 하나님께서 우리의 삶에 외형적 축복을 주신다고 하여도 실제로 우리의 삶은 늘 낮은 곳과 가난한 마음과 추운 광야에 머물러야 한다. 풍요로운 왕을 믿으면서도 나귀를 타신 가난하고 낮아진 예수님을 잊는다면 우리의 복음, 신앙 그리고 우리의 교회는 다시 집을 지어야 한다.
유대인들은 예루살렘으로 입성하신 예수님을 선지자로 여겼다. 물론 예수님은 선지자이시다. 그러나 단지 선지자로서만이 아니라 예수님은 구원자이셨다.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사람들이 나를 누구라고 하더냐 라고 질문하셨다. 그때 대부분의 제자들은 예수님이 엘리야 선지자나 예레미야 선지자, 그리고 세례요한 같은 선지자 중의 하나와 같은 선지자라고 했다. 그러나 베드로는 “주는 그리스도시오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니이다”(마16:16)라고 고백했다. 베드로는 예수님을 단지 우리의 외형적인 삶의 환경을 바꾸어 줄 물질적 예수가 아니라 사람이 가지고 있는 죄를 용서해 주기 위해 오신 구원자로 오신 분임을 믿었던 것이다. 그 때 예수님은 베드로의 그 고백을 칭찬하시면서 그 고백위에 내 교회를 세우겠다고 하셨다.
그렇다면 정말 예수님이 기뻐하시는 신앙, 그리고 그 신앙을 가진 사람들이 세운 교회는 어떤 교회가 되어야 하는 가에 대한 답을 얻게 된다. 그것은 바로 올바로 예수님을 보아야 한다. 예수님은 우리의 우상(偶像)이 아니라 형상(形像)이 되어야 한다. 예수님은 우리의 죄를 위해 오셨지 단지 우리가 필요로 하는 물질적인 필요, 재물, 건강, 지식, 명예 등에 머물지 않는다는 것이다.
한국일보 위싱턴판 2009년 4월 7일자 기사에 보면 미국의 기독교인들이 계속 줄고 있는 이유를 미국 남침례 신학교 총장인 앨버트 몰러(R. ALbert Mohler Jr.)의 말을 인용하면서 오늘 날 교회가 포스트모더니즘과 포스트 크리스천 시대의 문화적 위기를 맞았기 때문이라고 했다.
예수님에 대한 신앙은 우리의 생각과 철학에 근거해서 예수님을 확대시키거나 축소시킬 수 없다. 우리가 예수님을 소유한 것이 아니고 예수님이 우리를 소유한 것이다. 우리가 필요한 대로 예수님을 이용하는 것이 아니다. 배고프면 빵을 달라고 하고, 돈이 없으면 돈을 달라고 애걸할 대상자가 예수님이 아니다. 우리가 믿는 예수님은 나 같은 사람의 죄를 위해 대신 죽어 나의 생명을 살려 주신 구원자이시다.
예루살렘으로 입성하신 예수님을 향해 흔들었던 종려나무 가지가 빛을 바래지 않고 늘 푸르게 있어야 한다. 그 예수님을 진정한 왕으로 인정한다면 예수님을 허상(虛像)으로가 아니라 실상(實像)으로, 우상(偶像)으로 아니라 형상(形象)으로 섬겨야 한다.
오늘 우리는 이렇게 자신에게 물어야 한다. 내가 예수님을 환영하기 위해 흔드는 종려나무 가지는 아직도 푸르른 가지인가? 아니면 빛을 바랬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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