몇 년 전 한국에는 ‘장미와 콩나물’이라는 드라마가 있었다. 콩나물 값 깎으며 알뜰살뜰 살림만 사는 여성의 삶과 남성들을 사로잡는 화려한 장미 같은 여성의 삶을 대조시킨 드라마로 기억된다.
미국에는 ‘빵과 장미’가 있다. 20세기 초반 미국 시인 제임스 오펜하임의 시 제목으로 여성노동 운동사를 이야기할 때 자주 인용된다. ‘빵과 장미’는 차별과 착취로 시달리던 여성들이 인간다운 삶을 누리고 싶은 간절한 소망을 담고 있다.
지난 며칠 ‘여성의 삶’을 생각해보게 하는 날들이 연이어 있었다. 우선 3월8일은 ‘세계 여성의 날’이었다. 1910년 코펜하겐에서 열린 국제 여성노동자대회에서 독일의 노동운동가 클라라 제트킨이 제창해 만들어진 날이다. 그 이듬해부터 세계 각국에서는 여성의 권익신장을 촉구하는 행사들이 시대와 지역 상황에 따라 다양하게 펼쳐져왔다.
미국에서는 1908년 3월8일 여성근로자들의 대규모 시위를 기념해 1909년부터 ‘여성의 날’이 시작되었다.
그로부터 50년 후인 1959년 3월9일 미국에는 아주 특별한 여성이 태어났다. 실물 크기로 하면 ‘36-18-38’의 ‘아찔한’ 체형을 가진 금발미녀 바비의 탄생이다. 지난 50년 동안 여성들의 다이어트, 성형, 심한 경우 거식증 등 살을 빼려는 노력은 바비와 무관하지 않다. 어려서부터 TV 화면으로 접하는 게 바비 같은 모델, 배우들이니 영향을 받지 않을 수가 없다.
군살 하나 없는 바비의 50세 생일 축하파티는 말리부, 상하이 등 세계 여러 곳에서 호화롭게 펼쳐졌다.
그리고 이틀 후인 3월11일 오바마 대통령은 낸시 펠로시 연방하원의장, 발레리 재럿 백악관 선임고문 등 여성들에게 둘러싸여 서명식을 가졌다. 백악관 여성위원회 창설 행정명령에 대한 서명이었다. 여성이 하원의장도 되고 장관도 되는 세상이지만 여전히 ‘위원회’가 필요할 만큼 차별이 존재한다는 사실을 단적으로 보여주는 장면이었다.
미국에서 ‘여성의 날’이 생긴 지 100년, 여성들은 남녀평등의 어느 지점까지 와 있을까.
100년 전 미국 여성근로자들의 처지는 비참했다. 산업화와 대규모 이민물결이 맞물리던 당시 방직공장, 봉제공장 등 공장주들은 힘없는 이민 여성들을 고용해 혹사했다. 이들 여성은 14살만 되면 공장에 나가 일했고, 하루 10여 시간씩 일한 임금이 남성 임금의 1/2-1/3 수준이었다.
참다못한 여성 노동자들이 근로조건 개선을 요구하며 시위를 벌이곤 했는데 그 대표적인 사건이 1912년의 ‘로렌스 파업’이었다. 매서추세츠, 로렌스의 섬유공장 노동자들은 ‘파업하나 일하나 배고프긴 마찬가지’라는 결론에 도달하면서 파업에 들어갔다. 그 과정에서 수백명이 체포되고 다치면서도 이들은 끝내 싸워 요구조건을 관철해냈다. 이때 여성노동자들이 구호로 부른 노래가 ‘빵과 장미’였다. 그래서 ‘빵과 장미의 파업’으로도 불린다.
여성들의 노동운동을 지지하던 오펜하임이 1911년 12월 발표한 시를 이듬해 파업 슬로건으로 삼은 것이다. “마음도 굶주리고 몸도 굶주리네 : 빵을 달라, 장미도 달라”는 내용이었다. ‘빵’은 생존에 필수적인 몸의 양식, ‘장미’는 정서적 허기를 채워줄 마음의 양식으로 이해된다.
여권운동은 한마디로 ‘빵’의 공평한 분배를 요구하는 운동이다. 미국에서 여성 노동자는 전체의 49%이다. 하지만 포춘 500대 기업의 최고경영자 중 여성은 3%뿐이고, 남성이 1달러를 벌 때 여성은 78센트를 받고 있다. 하지만 개선 속도가 빠르다. ‘빵’의 측면에서 여성들은 21세기에 와있다.
문제는 ‘장미’다. 능력 있는 일꾼으로 평가받고 싶은 욕망 못지않게 여성들이 바라는 것은 사랑이다. 그런데 많은 남성들은 여전히 지적 능력보다는 외모에서 여성의 매력을 찾는다. 똑똑한 여성에 대해 거부감을 갖는 남성들도 적지 않다. 그래서 고소득의 전문직 여성들은 데이트 상대 구하기가 쉽지 않다. 남성들의 정서가 20세기를 넘어서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많은 여성들은 갈등을 느낀다. 21세기가 기대하는 여성과 남성들이 원하는 여성 사이의 괴리를 어떻게 넘어설 것인가. 여성들이 당당하게 ‘빵과 장미’를 모두 차지하려면 아직 시간이 걸릴 모양이다.
권정희 논설위원
junghkwon@koreatime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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