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달 말 ‘홈디포’에 갔을 때다. 블라인드 폭이 너무 넓어서 잘라야 했는데 자르는 사람이 한국말로 “안녕하세요?” 했다. 알고 보니 그는 내가 잘 아는 한인을 잘 알았고, 그로부터 한국말 몇 마디를 배운 것이었다. 그가 8개의 블라인드를 자르면서 열심히 한국문화와 음식을 칭찬하는데, 마침 물건을 사러왔던 그의 친구가 다가왔다.
흑인인 그들을 보면서 전날 밤 오바마 대통령의 국정연설이 생각나 자연스레 그에 대한 말을 꺼냈다. 우리는 “똑똑한 대통령의 연설이 참 상쾌했었다” 에서 “얼굴까지 잘 생긴 대통령이다”로 바뀌다가 “흑인 대통령이 뽑혔다는 사실이 아직도 믿겨지지 않는다”는 말을 하며 대화를 끝냈다.
목소리가 컸던 친구가 떠나자 그는 그제야 생각났다는 듯 주위를 둘러보며 나직이 말했다. “여기선 이런 얘기들을 전혀 안 하지요” 무슨 얘기인 줄은 알지만 왜 그런 지는 이해되지 않았다. 그날 학교에서는 온종일 사람들과 그런 대화만 나눴던 것이다.
“일하는 사람들 중 흑인도 많은데 왜 그렇죠?” 그가 대답했다. “일도 일 나름이죠”
내가 더욱 믿기지 않는다는 얼굴을 보이자 그가 목소리를 더욱 낮춰 말했다. “가게 앞문 쪽에서 뒷문 쪽으로 갈수록 더 심한 걸요”
“국민의 50% 이상이 뽑은 대통령이잖아요. 미국인구 70%인 백인 중 거의 50% 가 오바마에 표를 던진 건데 그 사람들은 다 어디 있단 말이에요?”
그가 쓴웃음을 지으며 시니컬하게 답했다. “그들은 모두 이 가게 밖에 있지요”
마치 흑인 노예시절이 되돌아간 것 같은 과장된 느낌이 들었다. 아니 ‘되돌아간 것’이 아니라 ‘계속 지속된 것’이 아닌가?
그날 밤 세계적 신인 오페라 가수의 음악회에 가게 되었다. 아는 사람들 몇몇과 박스 석에 앉았는데, 그들 중 하나는 로라였고 하나는 매지였다. 로라는 실력 있고 부유한 멋쟁이 유지로 알려진 독신의 백인여성이고, 매지는 흑인으로 국제적으로 알려진 의사 남편과 함께 역시 유지로 알려진 사람이다. 그의 남편도 흑인이다.
음악회가 시작되었다. 관객이 몇 번씩 서서 박수 칠 정도로 가수의 실력이 대단했다. 그는 마지막으로 성가 몇 곡을 불렀다. 그때 뒷좌석의 로라가 매지에게 속삭이는 소리가 들렸다.
“저 친구 흑인 교회라곤 발도 들여 놓지 않은 게 분명해. 부모 중 하나는 백인이 분명하고 저 친구는 그 백인교회에 다녔어. 성가하는 스타일이 흑인 스타일이 아니야”
매지가 말했다. “듣고 보니 그러네. 나는 생각도 못하고 있었는데. 당신은 어떨 땐 나보다 더 흑인 같아” 로라가 웃으며 말했다. “하지만 난 당신처럼 이런 말을 아무데서나 못하잖아. 이 박스 석에서만 안전하지”
로라는 흑인 모임에도 자주 간다. 그 모임에 가면 분위기에 걸맞은 말과 행동을 해서 참석한 사람들이 그가 백인임을 잊게 만들 정도로 화통하다. 그래서 모르는 흑인이 들으면 인종차별적이라고 할 말들을 거침없이 할 수 있었던 것이다. 그는 아무데서나 그런 말을 할 수 없음도 잘 안다.
음악회를 나와 좁은 자리에 가까스로 주차한 차를 빼려니, 눈길이 미끄러워 억지로 빼려 했다가는 앞뒤의 차를 받을 것만 같았다. 앞차는 부유층 노인들이 좋아하는 고급 캐딜락이었다. 음악회에 부유층 노인들이 많이 참석했는데 그 중의 한 사람이 주인일 것 같았다. 다 끝났으니 좀 기다렸다가 그 차가 나가면 차를 빼기로 했다.
시동을 걸어 놓은 채 모르는 차 주인을 기다리며 한 차로 온 매지와 얘기를 나누는데 근처의 한 아파트에서 흑인 하나가 나와 캐딜락을 빼주었다. 다운타운의 가난한 동네라 그곳 주민이 캐딜락 주인일 것이라곤 생각도 못했는데 그가 창밖으로 우리를 보고 있다가 나온 것이었다. 내가 머리까지 숙인 채 고마움을 표시하며 모퉁이를 돌아 나오는데, 지금까지 로라 얘기를 하며 깔깔 웃던 매지가 이번엔 나 때문에 깔깔 웃으며 말했다. “당신, 그 고급차 주인이 이 가난한 동네의 흑인일 줄은 생각도 못했지? 그러니까 그렇게 티피컬 하게만 생각하지 말라구”
나도 한 마디 했다. “당신도 조심해. 같은 흑인이라도 당신은 상류층이라서 그런 말은 이 차 안에서만 안전하다구”
하루 동안 세번이나 인종과 계층이 복합된 독특한 경험을 하면서 미국이 멜팅팟임을 다시 한 번 피부로 느꼈다.
김보경
대학 강사·수필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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