짐 캐리가 주연으로 나왔던 영화 ‘트루먼 쇼’가 요즘 생각이 난다. 주인공 트루먼 버뱅크는 영화 세트장 같이 말끔한 동네에서 흠잡을 데 없이 완벽한 이웃들과 경쾌하게 하루하루를 살아가는 평범한 회사원. 그런데 그 도에 넘치는 평범함에 비밀이 있다.
“딱히 집어낼 수는 없지만 뭔가 이상하다” 싶은 느낌이 스멀스멀 스며들 즈음 관객들은 영화 속의 비밀과 만난다. 주인공 트루먼을 살펴보는 시선이 우리 실제 영화 관객들 말고 또 있다는 사실이다. 영화 속의 시청자들이다.
트루먼은 하루 24시간 생방송 되는 리얼리티 쇼의 주인공. 전 세계 시청자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그는 쇼를 위해 만들어진 세트장에서 배우들로 구성된 이웃, 아내, 직장 동료들과 살아간다. 태어나서 근 30년 자신의 삶의 무대가 허구였다는 사실, 결국 자신의 삶 자체가 ‘비현실’이었다는 사실을 알게 된 순간 그는 탈출을 감행한다.
영화를 보며 트루먼을 안쓰러워했던 우리는 어떤가. 영화가 개봉된 1998년 이후 줄잡아 10년, 우리의 삶 역시 허구에 바탕 한 ‘비현실’은 아니었을까 요즘 생각이 든다. 트루먼을 둘러싼 허구가 눈에 보이고 손에 잡히는 ‘물리적 허구’였다면 우리가 통과해온 허구는 숫자를 바탕으로 한 ‘머릿속 허구’였다.
집값, 주가가 펑펑 뛰어올라 가만히 있어도 부자가 되는 것 같았고, “집 에퀴티 조금만 뽑으면” 아이들 대학 등록금이건 사업자금이건 은퇴 후 삶이건 … 걱정이 없을 것 같았다. 금융파생상품을 선두로 치솟던 자산 가치를 따라 모두들 구름 위를 걸었다. 숫자가 만들어낸 ‘세트장’을 반석 같은 현실로 알고 그 안에서 우쭐대고 욕심 부리고 부러워하던 모습을 누군가 저 높은 곳에서 내려다보았다면, ‘그분’도 우리를 안쓰러워하지 않았을까.
노동통계국이 오늘아침 2월 실업 현황을 발표했다. 지난 한달간 사라진 일자리는 65만1,000개. 한달에 50만개 넘게 일자리가 사라진 것이 이번으로 4개월째다. 그나마 위안은 지난 12월의 68만1,000개, 1월의 65만5,000개에 비해 지난달에는 일자리가 덜 줄었다는 사실이다.
이로써 불경기가 시작된 2007년 12월 이후 일자리를 잃은 사람은 총 440만명, 실업률은 4반세기만에 최고수준인 8.1%가 되었다. 상황이 더 심각한 캘리포니아는 지난 1월 실업률이 이미 10%선을 넘어섰다. “잘하면 20,000까지 치솟는 게 아닐까?” 라는 말이 나돌던 다우존스지수는 6,000대에서 주춤거리고, 집값은 4-5년 전 수준으로 떨어지면서 신기루는 사라졌다.
‘숫자’는 그대로 현실로 우리를 조여오고 있다. 대부분 기댈 곳은 오로지 그달 그달의 수입인데 많건 적건 일정 수입이 보장되지 않는 사람들이 너무나 많다. 시장이 꽁꽁 얼어붙은 것이다.
실리콘 밸리에서 하이텍 전문가로 잘 나가던 분이 지난 해 감원을 당했다. 그때만 해도 상황이 이렇게 까지 나쁠 줄은 몰랐다고 했다. 그후 몇달간 100군데쯤 이력서를 보냈는데 “오라는 곳은커녕 인터뷰하자는 곳도 없더라”고 했다.
주류사회 대기업에서 일하는 한 전문직 여성은 “1차 구조조정 때만 해도 모르는 사람들이 대상이었다. 2차 구조조정 때는 아는 이름들이 포함되어 있었다. 그런데 이번에는 바로 직속상관이 감원되었다. 너무 무섭다”고 했다.
사회 전반의 분위기가 ‘걱정’ ‘불안’을 넘어 ‘두려움’의 지경으로 들어서고 있다. 앞날에 대한 두려움으로 소비자들이 돈을 쓰지 않으니 매출이 줄고, 생산이 따라 줄고, 그만큼 일자리가 줄고, 결국 소비가 더 줄어드는 악순환이 눈앞에 보인다. 빚 무서운 줄 모르고 신나게 크레딧카드를 쓰던 사람들이 이제는 경기부양 수단이라며 돈을 손에 쥐어줘도 쓰지를 않는다.
‘두려움’은 몇 가지 특성이 있다. 첫째, 작은 것에도 커다란 그림자를 만들어준다. 똑같은 늑대라도 두려워하면 더 커 보인다는 독일 속담이 있다. 둘째, 두려움은 새끼를 친다. 두려움이 일단 마음속에 똬리를 틀면 이것도 두렵고 저것도 두려워진다. 셋째, 두려움은 뇌의 작용이다. 실제와 무관하다. ‘FEAR’(두려움)는 False-Evidence-Appearing-Real(실제처럼 보이는 가짜 증거)이라고 한다.
재정적으로 우리는 평생에 다시없을 ‘폭풍우’를 맞고 있다. 힘들수록 경계해야 할 것은 두려움으로 인한 자포자기이다. 상상을 해보자. 지금 우리는 폭풍우를 무대장치로 한 ‘트루먼 쇼’에 출연하고 있다고. 폭풍우 속에서 항해하는 법을 배워야 하겠다.
권정희 논설위원
junghkwon@koreatime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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