와인의 맛의 뼈대는 포도품종이다. 품종에 따라 맛의 가닥이 잡힌다. 가닥 잡힌 맛을 미묘하게 흔들어 와인의 특징을 만드는 것은 자연환경, 테르와르. 재배지의 토질, 강수량, 일조량 등 자연의 다양한 요소들이 상호 작용하면서 포도에 섬세한 맛과 향을 더한다.
이들이 맛의 수평적 특징을 만들어 낸다면 수직적 특성을 만드는 요인은 뿌리다. 깊고 그윽한 맛은 땅속으로 수십 미터 씩 뻗은 뿌리가 깊이만큼 복합적인 양분과 미네랄을 흡수해 얻어낸 결실. 나무가 오래될수록 뿌리가 깊고, 와인의 맛이 깊다.
포도나무와 와인의 상관관계를 생각하다 보면 ‘사람’이 떠오른다. 우리 모두 타고난 유전자를 바탕으로 환경의 영향을 받으며 ‘오늘의 나’로 형성되었다. 타고난 만큼, 노력한 만큼 학벌, 지위, 부를 일궈냈다. 그런데 사람에게는 이런 외형적 성취와 별개로 또 다른 ‘결실’이 있다. 인간으로서의 성숙도, 인품이다. 존재의 깊이가 만들어 내는 ‘맛’ 혹은 ‘향’이다.
설익은 성공과 탐욕이 판치는 이 시대에 깊은 인품으로 우리의 고개를 숙이게 만드는 인물은 많지가 않다. 사라져가는 그 ‘희귀종’을 우리는 ‘어른’이라고 부른다.
지난 한주는 김수환 추기경의 선종으로 시작해 장례의식으로 끝이 났다. 나 한 몸 지탱하기도 팍팍한 이 추운 겨울, 이 추운 경제 속에서 명동성당을 향한 추도행렬은 끝이 없었다.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그분에게서 위안을 받아왔는지가 새삼 드러났다.
‘이런 추모 열기는 기적’이라는 보도들과 함께 눈길을 끈 것은 ‘어른’이라는 단어였다. ‘어른’ ‘큰 어른’ ‘큰 어르신’이란 단어를 이렇게 많이 접해보기는 처음이다. ‘어른’으로 불린 인물, 불리는 인물이 누가 있을까 - 짚어보지만 별로 없다.
‘어른’이 사라진 사회, ‘어른’을 귀히 여기지 않는 문화 속에서 바위처럼 확실하게 ‘어른’이었던 분이 우리 곁을 떠나신 것이다.
나이로 어른은 많지만 존재의 무게로 어른은 많지가 않다. 세상에는 많은 성공한 사람들, 영웅으로 추앙받는 사람들이 있지만 그들은 일궈낸 성취를 근거로 그만큼의 존경을 받을 뿐이다. ‘어른’과는 또 다르다.
수령이 100년쯤 된 포도나무 같은 존재라고 할까. 뿌리가 아주 깊어서 인생의 온갖 쓴맛 단맛을 다 흡수해 존재 속에 녹여 냄으로써 더 이상 미움, 원망, 분노, 질시 같은 팔팔한 감정들은 떠오르지 않고 자비와 연민만이 도도한 경지. 그래서 존재 자체로 권위가 있고, 그 앞에 서면 나도 모르게 내가 작아지며, 기쁨으로 순종하게 만드는 대상이다.
‘어른’은 우리 나이만 먹은 어른들과 ‘눈’과 ‘가슴’에 차이가 있는 것 같다. 시야가 넓어 세상 섭리가 한눈에 들어오는 혜안과 세상 많은 이들을 가슴에 담는 드넓은 품이다. 그래서 곧고 맑으며 너그럽고 넉넉하고, 담대하고 담담한데, 많은 이들이 기억하는 김 추기경이 그러하다. 나와 내 가족만 눈에 들어오는 좁은 시야, 가까운 몇 사람 겨우 품은 좁은 가슴으로는 아무리 나이를 먹고 사회적으로 성공해도 ‘어른’은 아니다.
파울로 코엘료의 짧은 글 모음집에 ‘연필 같은 사람’이란 글이 있다. 연필의 특성들에 빗대어 우리 삶을 돌아보게 하는 글이다. 인간적 성숙에 이르는 지혜를 담고 있다.
첫째, 연필은 손에 이끌려 움직인다. 우리도 우리를 이끄는 존재, 신의 인도가 있다는 사실을 명심하라는 것이다. 둘째, 연필은 가끔 깎아야 할 때가 있다. 당장은 아프지만 심이 더 예리해져서 이후로는 더 잘 써진다. 우리가 살면서 겪는 고통과 슬픔의 경험을 말한다.
셋째, 연필에는 지우개가 달려 있다. 실수를 지울 수가 있는 것이다. 잘못을 부끄러워하는 대신 지우개로 지우듯 바로 잡음으로써 옳은 길을 갈 수가 있다. 넷째, 연필에서 중요한 것은 바깥의 나무가 아니라 안의 심이다. 겉모습에 연연하지 말고 내부의 소리에 귀를 기울이라는 말이다. 다섯째, 연필은 항상 흔적을 남긴다. 우리가 살아가면서 하는 모든 행동들이 흔적으로 남는다는 무서운 사실을 기억한다면 행동거지를 조심하게 될 것이다.
사람마다 타고난 그릇이 있다. 누구나 ‘큰 어른’이 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눈앞의 열매보다 뿌리에, 연필의 알록달록한 나무 보다 심에 마음을 기울이는 훈련은 필요하다. 내 존재의 포도로 가능한 가장 깊고 그윽한 맛을 완성해 보는 것이다.
권정희 논설위원 junghkwon@koreatime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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