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따금 산보를 하며 동네 정원들을 관찰해보면 어린 나무들은 자라는 모습이 눈부시다. 키가 쑥쑥 자라고 연초록의 잎들이 새록새록 돋아나 하루가 다르게 무성해진다. 그런가하면 그 옆의 오래된 나무들은 늘 그 모습이 그 모습일 뿐 별 변화가 없다.
생동감이 넘쳐서 보기에 좋은 어린 나무들은 그러나 목재로는 불합격이다. 풍상을 겪으며 단련될 기회가 없어서 강도가 떨어진다. 이런 나무를 잘라 목재로 쓰면 벌레가 생기고 뒤틀리고 갈라져서 낭패를 볼 수가 있다.
목재로 최상품은 비바람, 눈보라 맞으며 오랜 세월을 견뎌낸 고목. 그런 나무로 지은 집은 대대손손 물려도 문제가 없다. 한마디로 ‘연륜의 힘’인데 사람과 사람 사이의 관계도 그 비슷하다.
밸런타인스 데이 며칠 전 뉴욕타임스에는 독자들의 마음을 특별히 사로잡은 칼럼이 있었다. 뉴욕타임스 에디터인 대나 제닝스가 쓴 ‘전립선 암 투병 중의 사랑’이라는 칼럼이었다.
그는 지난해 4월 전립선암 진단을 받고 7월에 수술을 받았지만 예후가 좋지 않아 방사선 치료를 33번이나 받고 지금은 호르몬 치료 중이라고 한다. 그 투병 과정을 그는 매주 칼럼으로 담담하게 전하고 있는데 이번 주에는 밸런타인스 데이를 앞두고 ‘사랑’에 관해 썼다.
현란한 사랑의 고백, 가슴 절절한 사랑의 노래 … 젊은 연인들이 주고받는 그 모든 사랑의 표현은 필요하고 좋은 것이다. 하지만 암으로 투병하며 죽음을 현실로 느끼다보니 결국 사랑은 그 구체성에 있더라고 그는 결론을 내렸다.
전립선 제거 수술 후 거즈더미로 싸인 상처부위를 보살펴주고, 오줌을 받아주고, 소변 량을 재고, 그 스스로는 들여다 볼 수없는 부위를 들여다보며 베이비파우더를 넉넉히 뿌려주고, 얼음찜질을 해주는 등 그의 아내가 그를 위해 하는 모든 소소한 구체적 행동들이야말로 가장 확실한 사랑의 증거라는 것이다.
“지금 나는 소위 ‘일등신랑감’과는 거리가 멀다”고 그는 농담을 한다. 질금질금 오줌이 흘러 남성용 패드를 쓰고, 흉터가 ‘종합선물세트’ 수준인데다 7개월 째 성기능도 마비된 상태이니 어떤 여자가 좋다고 하겠는가. 게다가 암 재발 방지를 위해 테스토스테론 억제 주사를 맞다보니 갱년기 여성처럼 핫플래시가 생겨 엄동설한에 밖에 나가서도 땀을 흘리는 우스꽝스런 모습이라고 한다.
그런 그를 부드럽게 도닥여주고 고개 끄덕이며 들어주고 자상하게 미소 지어주는 아내를 보며 “세상에 어떤 사람이 나에게 이렇게 해줄 수 있을까” 생각을 한다고 했다. 암 투병이라는 역경이 닥치자 두 사람의 사랑은 오히려 깊어졌다고 그는 고백했다.
그들 부부는 1981년 결혼해 두 아들을 낳고 키우며 27년을 함께 살았다. 그 오랜 세월을 부부가 함께 살자면 순탄하기만 했을까. 때로는 좋고 때로는 나쁜 희로애락의 세월들을 같이 겪어냈을 것이고, 그 단련의 시기를 거치며 부부사이는 웬만한 어려움에는 꿈쩍도 않는 고목같이 되었을 것이다. 오랜 세월을 같이 지낸 사람들만이 누릴 수 있는 연륜의 축복이다. 독자들은 ‘가장 사랑스러운 밸런타인 메시지’ 라며 줄줄이 댓글을 달았다.
일상의 자잘한 것들을 소재로 삼는 시인 한미영의 ‘밀가루 반죽’이라는 시가 있다. 밀가루 반죽이란 ‘밀가루’와 ‘물’이라는 전혀 다른 물질을 오래도록 치대고 주물러서 ‘한 몸’으로 만든 것. 부부의 ‘한 몸’과 다르지 않다.
막 사랑에 빠진 젊은 연인들은, 반죽으로 치면, 한 그릇 안에 처음 들어간‘밀가루’와 ‘물’. 전혀 새로운 서로에 대해 감탄하고 수십억분의 일의 확률로 만난 인연에 경이로워하는 이 단계의 사랑은 곧 열정이다.
그래서 연인들은 결혼을 하고 부부가 되지만 그렇다고 바로 ‘반죽’으로 완성되는 것은 아니다. 오래도록 ‘밀가루’따로 ‘물’따로 이다. “서로 다른 것이 한 그릇 속에서/ 저처럼 몸 바뀌어 말랑말랑하게/ 사는 게 어디 그리 쉬운가”- 시인은 말한다.
그러나 세월이 지나며 “처음 역하던 생내와/ 좀체 수그러들지 않던 빳빳한 오기도/ 하염없이 시간에 팍팍 치대다 보면” 별개의 두 존재가 말랑말랑해지면서 마침내 하나가 되는 것이다. ‘반죽’은 한 존재가 다른 존재와 더불어 이룰 수 있는 가장 높은 차원의 관계이다.
젊은 사랑은 열정의 정도로, 나이든 사랑은 깊이로 말한다. 사랑의 날을 맞아 사랑을 돌아보자. 이 생에서 나는 어떤 사랑을 가꾸고 있는가.
권정희 논설위원
junghkwon@koreatime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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