며칠 전 오렌지카운티에 사는 한 독자에게서 전화가 걸려 왔다. 영화 ‘짧은 만남’(Brief Encounter)을 보고 싶은데 어디서 비디오를 구할 수 있느냐는 것이었다.
이 영화는 어느 목요일 영국의 한 작은 도시 기차역 찻집에서 우연히 만난 두 기혼 남녀가 그 후 매주 목요일마다 이 도시에서 밀회를 한 뒤 각자 서로 반대방향으로 가는 기차를 타고 자기 집으로 돌아가는 얘기로 데이빗 린이 감독한 아름다운 소품이다.
두 주연 배우 트레버 하워드와 실리아 존슨이 너무나 배우 같지 않게 생겨 그들의 못 이룰 사랑이 더욱 가슴을 저릿저릿하게 만든다. 특히 영화에는 라흐마니노프의 피아노협주곡 제2번 제2악장의 감미로우면서도 우수가 깃든 주제가 계속 흐르면서 두 중년 연인의 이별을 부추기고 있다.
라흐마니노프의 음악이 효과적으로 쓰여진 또 다른 연애 영화가 ‘수퍼맨’ 출신의 고 크리스토퍼 리브가 나온 ‘시간을 너머 어느 곳에’(Somewhere in Time)이다. 젊은 남자가 사망한 여배우의 초상화에 반해 과거로 시간여행을 해 이 여인과 사랑을 나누다가 결국 상사병으로 죽는 감상적인 내용이다.
라흐마니노프의 로맨틱한 ‘파가니니의 주제에 의한 라프소디’가 영화 전편을 칭칭 휘어 감으며 청승을 떨고 있다. 그의 어둡고 감정적인 음악은 이렇게 비련 영화에 잘 어울린다.
내일은 연인들이 서로에게서 사랑을 확인하는 밸런타인스 데이다. 날을 잡아 놓고 사랑을 확인 한다는 일이 국경일 행사를 치르는 것 같아 나로서는 별로 달갑지가 않다.
영화 ‘카사블랑카’(14일 하오 7시30분 에어로 극장서 ‘지상에서 영원으로’와 동시 상영)에서도 둘리 윌슨이 ‘세상은 언제나 연인들을 환영할 것입니다’라고 노래했듯이 사랑하는 사람들의 날은 1년 365일이 모두 그들의 것이다. 어쩌면 인간의 사랑은 이 ‘언제나’를 제대로 감당하지 못해 이렇게 날을 잡아놓고 그 것을 경축하는 지도 모르겠다.
세상에 변치 않는 것이 없다고 실제 인간의 사랑과 영화 속 사랑도 세월이 흐르면서 상당히 변질된 것 같다. 최근 한국에서 20세 이상의 남성 265명을 대상으로 조사를 한 결과 밸런타인스 데이 선물로 현찰을 원한다는 사람이 전체의 27%인 68명으로 가장 많았다고 한다. 이러니 시집 올 때 혼수 적게 가져 왔다고 아내를 패는 남편이 나오는 것은 당연지사라고 하겠다. 참으로 삭막한 세상이 된 것 같다.
영화도 마찬가지다. 옛날 연애 영화는 로맨스 영화였지만 요즘은 로맨스가 섹스로 대치됐다. 남녀 둘이 만나자마자 침대로 뛰어들고 있다. 또 옛날 로맨스 영화에서는 주인공들이 옷을 갈아입어야 할 때를 빼곤 옷을 안 벗었으나 요즘에는 얘기와 아무 상관없이 툭하면 발가벗는다. 언젠가 한국서 온 한 영화인이 한국 사람들은 특히 여자가 옷을 벗지 않으면 영화를 잘 안 본다고 한탄조로 말한 것이 기억난다.
그래서 연애 영화도 옛날 것이 요즘 것보다 훨씬 더 로맨틱하고 아름답다. 그런데 명작 로맨스 영화치고 해피엔딩이 거의 없다. 해피엔딩으로 언뜻 생각나는 것이 모두 오드리 헵번이 나온 ‘티파니에서 아침을‘(13일 하오 7시30분 에어로 극장서 ‘로마의 휴일’과 동시 상영)과 ‘하오의 연정’ 2편 정도다. 사랑은 결코 ‘그리고 그들은 그 뒤로 내내 행복하게 살았노라’라는 동화적 본질을 지니지 못 했는지도 모른다.
그러니까 좋은 연애 영화의 연인들은 전부 죽거나 아니면 헤어지게 마련이다. 사랑은 죽어서야만 완성된다는 것을 보여준 두 10대가 로미오와 줄리엣이다. 여러 다른 ‘로미오와 줄리엣’ 영화와 달리 유일하게 영화에서 두 주인공으로 10대 배우를 쓴 것이 프랑코 제피렐리가 감독한 ‘로미오와 줄리엣’(사진·13일 하오 7시30분 이집션 극장)이다. 당시 각기 17세와 15세였던 레너드 와이팅과 올리비아 허시가 진짜 아이들처럼 사랑에 웃고 울고 하는 모습이 사랑스럽기 짝이 없었다.
이 비극의 무대를 이탈리아의 베로나에서 멕시코의 베라크루스로 옮긴 뒤 레오나르도 디카프리오와 클레어 데인스를 로미오와 줄리엣으로 사용한 X세대 갱영화 ‘로미오+줄리엣’(14일 하오 7시30분 이집션 극장서 ‘물랑 루지’와 동시 상영)도 화끈하게 멋있다.
이들 영화들 외에 아메리칸 시네마테크는 밸런타인스 데이를 맞아 추억의 로맨스 영화들을 상영한다. 유부남을 사랑하는 여인(베티 데이비스)의 우아한 드라마 ‘자, 항해자여’(Now, Voyager)는 역시 데이비스가 나온 뜨거운 러브 스토리 ‘제저벨’(Jezebel)과 15일 하오 7시30분부터 이집션 극장에서 동시 상영된다. 또 에밀리 브론테의 소설이 원작으로 로렌스 올리비에가 주연한 ‘폭풍의 언덕’(Wuthering Heights)은 18일 하오 7시30분부터 에어로 극장서 매혹적인 ‘마법에 걸린 작은 집‘(The Enchanted Cottage)과 함께 상영된다. (323)466-FILM
편집위원/ hjpark@koreatime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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