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젯밤엔 기온이 섭씨 영하 17도까지 내려갔다. 지난주엔 이렇게까지 춥지 않았지만 하루 사이 눈이 20센티미터가 와서 모든 학교가 이틀간 문을 닫았었다. 이틀째엔 차량 통행금지령이 내려 차를 갖고 나온 사람들이 티켓을 받았다.
5만가정의 전기까지 끊어버린 눈이 엊그제 다시 3~4시간만에 15~30센티미터가 뿌려져 도시를 또 하얗게 덮었다. 이번엔 저녁수업만 휴강했다.
학교는 안 나가도 족쇄 같은 이메일 덕에 일을 해야 했다. 하지만 남편과 나는 틈나는 대로 에스키모처럼 옷을 껴입고 동네 도넛집, 찻집을 걸어갔다. 한밤중엔 펄펄 끓는 커피를 들고 뒷마당 눈 속에 앉아 킬킬거리며 금세 식는 커피를 벌벌 떨면서 마셨다.
몇 시간 떨어진 곳의 학교를 다니는 아들이 눈길에서 미끄러져 발목을 삐었다는 데도, 나도 얼음길에서 심하게 미끄러져 머리가 깨질 뻔 했는데도, 우린 반세기 나이를 잊고 콧속을 쨍하게 얼리는 공기를 헤치며 신나게 눈 속을 헤맸다.
2주간의 추운 날씨와 눈 더미로 불평을 넘어선 공포증에 시달리는 친구들에겐 눈치가 보여서 그런 느낌조차 표현할 수 없었다. 그래서 우리끼리 놀았다(?). 중부 사람들은 이 정도의 날씨로 벌벌 떤다. 내가 5년 살았던 디트로이트에선 이런 정도엔 눈도 깜짝하지 않는데.
하긴 나도 추운 날씨와 눈이 무서웠던 적이 한 번 있다. 2년 전 우리가 결혼 20주년 기념으로 아르헨티나에 있는 지구 최남단 도시 우슈아야에 갔을 때였다. 미국은 하지였고 그곳은 동지여서 한여름에 겨울옷을 싸들고 25시간만에 갔었다. 그 곳에서의 일주일은 아직도 가슴이 환해지는 아름다운 기억으로 엮어져 있지만, 우슈아야 국립공원에서의 시간만큼은 공포도 함께 엮어져 있다.
우린 택시를 타고 남단 바다의 전경과 환상적 숲으로 유명한 국립공원으로 나섰다. 기사는 공원 입구에 바리게이트가 쳐져 있으니 이제 걸어가라며 우릴 내려주었다. 우리가 서 있는 아스팔트가 순 얼음판이고 그 얼음판이 2km 정도 내리막으로 펼쳐진 것이 눈에 띄었을 땐 택시는커녕 사방 시야가 미치는 곳 어디에도 우리 외엔 아무도 없었다.
고무 밑창 등산화로 내리막 얼음길을 걷는 것은 역부족이었다. 길가 쪽은 더 심해서 그나마 드러난 흙이 울퉁불퉁 꽁꽁 얼어 있었고 나뭇가지에 눈 찔리기가 십상이었다. 결국 우린 주저앉아 엉덩이로 엉금엉금 기었고 누워서 뒹굴기도 했다. 그때만 해도 2km 끝 산책길 입구엔 안내해 주는 누군가가 있겠지 싶어 당장의 내 몸 걱정만 했다.
물론 산책길 입구에도 아무도 없었다. 다만 다윈이 5년 동안 살면서 생물, 인류, 지리를 연구한 비글해협의 눈 덮인 섬들과 파란 바다만이 신비하게 펼쳐져 있었다(다윈은 그 연구서적 출판 이후 유명해졌다). 숨 막히도록 아름다운 자연에 대한 외경은 우리의 동물적 소외공포를 잊게 했다. 산책길 입구부터 시작되는 노란 페인트의 방향막대들 역시 우리를 안심시켜 주었다. 어쨌든 이제는 언덕길이 되어버린 2km 얼음길을 되돌아 갈 수는 없었다.
바다와 접해 있는 산책길은 파란 바다 위의 하얀 섬들과 바다 밖의 모래, 조개껍질, 해초, 바위들이 육지 쪽의 숲의 정경과 어우러져 수채화만 같았다. 숲 속의 산책길은 줄기, 뿌리가 서로 얽혀 묘한 형상을 이루는 나무들, 가지에 곰팡이가 동그랗게 자라는 나무들, 초록색 낮은 식물들이 얽혀 환상적이면서 으스스했다.
우린 재미삼아 삶아온 달걀과 몇 알의 오렌지를 아껴 먹었다. 몇 시간 동안 개미 한 마리 못 만났지만, 노란 막대는 항상 약속이라도 해둔 듯 앞쪽에서 우리를 기다려 주었다. 그랬건만, 산책길을 반쯤 갔을 때였다. 노란 막대가 더 이상 보이지 않았다. 사방을 뛰어다녀도 지나온 길 말고는 더 보이지 않았다. 순간 온몸이 서늘해지면서 죽음이 차갑게 느껴져 왔다. 서울에서 우리를 기다리는 아이의 얼굴이 떠올랐다.
낮 2시 반이었지만 남극의 동짓날 해는 벌써 조금씩 기울고 있었다. 4시 반이면 어두워지기 시작할 텐데. 보통 3시간 걸리는 산책길을 3시간반 만에 반쯤을 왔으니 막대가 안내해 주어도 깜깜할 때쯤 끝날 텐데. 주위를 샅샅이 뒤진 끝에 드디어 낮은 식물에 가려진 노란 막대를 찾아냈다. 아직도 그때의 심장 떨림이 생생하게 기억난다.
그때부터 우린 숲의 오르락내리락 눈길, 얼음길을 온힘을 다해 뛰듯 걸었다. 드디어 택시기사와 만나기로 한 산장이 보였다. 4시 반이었으니 1시간 반 늦은 것이었다. 그가 산장 안에서 활짝 웃으며 뛰어나와 우리를 부둥켜안았다. 우리를 내려주고 갔던 것을 한참 후회하던 참이었음이 확실했다. 그러니 이 정도 날씨가 무슨 대수랴.
김보경. 북 켄터키대 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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