권정희 논설위원
가볍고 부드럽고 따뜻해서 겨울철이면 어느 집에나 한두개씩 있는 것이 있다. 플리스 재킷이나 담요다. 플리스는 1980년대 매서추세츠의 멀든 밀스라는 방직공장에서 처음 발명되었는데 이 회사에는 좀 특별한 이야기가 있다.
1906년 창업된 이 회사를 창업주의 손자인 아론 퓨어스타인이 경영할 때였다. 1995년 12월11일 불이 나서 공장이 전소되었다. 회사가 엄청난 어려움에 직면하면서 감원으로 지출을 줄이거나 인건비 싼 해외로 공장을 옮기는 방안이 예상되는 상황이었다.
그러나 퓨어스타인 회장은 그 어느 쪽도 택하지 않았다. 공장을 새로 짓는 몇 달 동안 사재를 털어 근 1,000명 직원의 봉급을 전액 지급하고 공장이 완공되자 전원 다시 불러들였다. “고용주가 성심껏 정당한 보수와 복지혜택을 제공하면 고용인들은 최선을 다해 일할 것이다”는 노사 간의 암묵적이고 기본적인 사회계약이 선하게 지켜진 예이다.
자고나면 감원뉴스가 터지는 요즈음에는 전설 같은 이야기이다. 지난해 미국에서 사라진 일자리는 260만개에 달한다. 올해는 감원 규모가 더 커져서 상반기 중에 200만명이 실직할 것이라는 전망이다. 갑자기 일자리를 잃은 친구나 친지 한두명 없는 사람은 이제 거의 없을 정도이다. 삼삼오오 모였다 하면 “그 회사는 몇 명 감원했다더라” “감원대상이 몇 명이라더라” “누구누구가 잘렸다더라”가 일상적 화제가 되었다.
실직은, 불경기에 수백만이 한꺼번에 겪는 보편적 현상이지만, 그로인한 고통은 개별적인 몫이라는 데 어려움이 있다. 많은 사람들이 동시에 감원 당했다고 해서 개별적으로 감당해야 할 고통이 줄어드는 게 아니다. 때로는 가족과도 나눌 수 없는 혼자만의 고통이 되기도 한다.
몇년전 감원 당한 경험이 있는 40대 직장인은 당시의 어려움을 이렇게 정리했다. 우선은 감원 통보를 받았을 때의 충격이다. 철퇴로 뒤통수를 얻어맞은 듯 멍한 충격에 상당기간 어리벙벙했었다고 한다. 둘째는 자신이 ‘필요 없는 존재’로 내쳐졌다는 자괴감, 그런 결정을 내린 고용주·상사에 대한 분노와 섭섭함이다.
셋째는 가족들에게 실직사실을 알려야 하는 부담감이다. 가능한 한 아내와 아이들이 충격을 덜 받게 배려하려다보니 선의의 거짓말을 하게 되더라고 했다.
“마땅히 할 일도 없으면서 매일 아침 프리웨이를 타고 시내로 나가려니 참 처량하더군요”
얼마 후 아내에게 사실을 털어놓고 나니 정신적 압박감이 훨씬 덜어졌지만 청소년기 아이들에게는 끝내 아빠의 실직을 말하지 않았다고 그는 말했다.
“한국 남성들은 어려움을 가족들에게 털어놓지 않고 혼자만 속에 담아두는 타입이잖아요. 지나고 보니 그게 건강하지 않은 것 같아요. 아내 뿐 아니라 아이들에게도 상황을 사실대로 말하고 가족이 같이 헤쳐 나가는 게 더 좋았을 것 같아요”
실직은 가족의 사망, 이혼· 실연, 질병 등과 함께 인생의 가장 고통스런 사건 중의 하나로 꼽힌다. 이들 사건은 기본적으로 ‘상실’이라는 공통점을 안고 있는데 실직은 대단히 복합적인 ‘상실의 사건’이다. 단순히 매달 받던 월급만을 잃어버리는 것이 아니다.
현대 사회에서 직업은 다양한 사회적, 심리적 욕구를 만족시키는 근원이 된다. 직장에서 하는 일을 통해 정체성을 갖고, 능력을 발휘함으로써 보람과 자부심을 느끼며, 존경도 받고, 사회적 지위도 얻는다. 직장을 통해 소속감을 느끼고, 대인관계를 맺으며 사회구성원으로서의 존재감을 갖기도 한다. 실직은 그 모두를 한순간에 잃는다는 말이 된다.
실직은 익숙했던 삶을 송두리 채 흔들어놓는 충격이다. 아침에 눈을 뜨면 다가드는 망망한 시간의 바다 앞에서 좌절하고 분노하며 절망감에 빠지는 것은 자연스런 현상이다. 하지만 이 또한 삶의 한 ‘과정’이라는 사실을 명심해야 하겠다. 모든 ‘과정’은 끝이 있기 마련이고, 그 ‘과정’ 또한 그 나름의 의미가 있는 법이다.
쌩쌩 달리는 성공의 프리웨이에서 잠시 탈락한 것이 비포장도로의 흙냄새와 야생초를 즐기는 기회가 될 수 있다. 실직을 계기로 평생 꿈꾸던 새 일을 시작하는 사람도 있고 두 번 다시 감원 대상이 되지 않도록 자기투자에 나서는 사람도 있다.
성공은 넘어진 것보다 한번더 일어나는 사람의 몫이라고 했다. 7번째 넘어지고 그대로 주저앉으면 실패한 인생이 되지만, 한번더 일어나면 성공한 인생이 될 수 있다.
junghkwon@koreatimes.com
댓글 안에 당신의 성숙함도 담아 주세요.
'오늘의 한마디'는 기사에 대하여 자신의 생각을 말하고 남의 생각을 들으며 서로 다양한 의견을 나누는 공간입니다. 그러나 간혹 불건전한 내용을 올리시는 분들이 계셔서 건전한 인터넷문화 정착을 위해 아래와 같은 운영원칙을 적용합니다.
자체 모니터링을 통해 아래에 해당하는 내용이 포함된 댓글이 발견되면 예고없이 삭제 조치를 하겠습니다.
불건전한 댓글을 올리거나, 이름에 비속어 및 상대방의 불쾌감을 주는 단어를 사용, 유명인 또는 특정 일반인을 사칭하는 경우 이용에 대한 차단 제재를 받을 수 있습니다. 차단될 경우, 일주일간 댓글을 달수 없게 됩니다.
명예훼손, 개인정보 유출, 욕설 등 법률에 위반되는 댓글은 관계 법령에 의거 민형사상 처벌을 받을 수 있으니 이용에 주의를 부탁드립니다.
Close
x