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바마 대통령 취임 첫 주. ‘새로운 시대의 개막’이라는 흥분이 아직 가시지 않고 있다. 그의 취임 첫날, 둘째 날 … 행보를 세세히 전하는 앵커, 토크쇼 진행자, 기자들의 목소리에서, 출연자들의 태도에서 설렘이나 들뜸 같은 싱싱한 에너지가 여전히 묻어난다.
지난 며칠 미국은 이전과는 전혀 다른 미국이었다. 나라 전체가 이렇게 긍정적이고, 적극적이며, 협조적인 분위기에 휩싸인 것을 본 적이 없는 것 같다. 2001년 9.11 테러 직후 온 국민이 똘똘 뭉친 적이 있기는 하지만 당시는 외부 공격에 대한 반작용의 성격이 컸다. 또다시 테러에 희생될 수는 없다는 생존 본능적 단결, 그래서 불안과 경계를 배경으로 한 단결이었다.
지금은 다르다. 한마디로 ‘행복한’ 단합이다. 20일 취임식 현장을 취재한 LA 타임스의 한 칼럼니스트는 이렇게 썼다. “엄동설한에 그 많은 사람들이 어깨와 어깨를 부딪치며 그렇게 오래, 그렇게 참을성 있게, 불평이나 후회 한마디 없이, 오히려 희망과 자부심에 들떠서 서있는 것은 내가 현장에 없었더라면 믿기 어려운 일이었다”
오클라호마나 텍사스에서 20시간씩 운전을 하고 워싱턴 DC 근교에서 내셔널 몰까지 다시 5시간이나 걸려 도착하고도, 영하의 추위에 온몸이 얼어붙는 듯해도, 인파에 치여 이리 부딪치고 저리 밟혀도, 하나 같이 입가에 웃음이 떠나지 않고, 처음 보는 사람들에게 안부를 묻고, 대통령 취임선서가 끝나자 오랜 친구들처럼 서로 포옹하는 광경은 모두가 거대한 한 가족 같았다고 전했다.
천리 길이 멀게 느껴지지 않고, 살을 에는 추위가 춥게 느껴지지 않으며, 몇 시간을 서있어도 다리 아픈 줄 모르는, 그저 감격스럽고 행복하기만 한 이 현상을 어떻게 설명할 것인가.
취임식에서 국가를 불렀던 아리타 프랭클린이 21일 래리 킹과의 인터뷰에서 정답을 내놓았다 - “미국은 지금 오바마와 사랑에 빠진 거예요”
사랑에 빠지면 우선 나타나는 현상은 엔돌핀이 마구 솟는 것이다. 그래서 상대방의 모든 게 좋아 보이고 그가 하는 모든 말이 믿어지며 날아갈 듯 기분이 좋은 것이 사랑의 첫 단계이다. 장밋빛 안경을 쓴 듯, 초점 안 맞춘 렌즈로 들여다보듯 현실은 장밋빛으로 아련하다.
대통령과 국민의 관계가 사사로운 연인관계와 같을 수는 없다. 하지만 넓은 의미에서 사랑의 관계에 대입해도 무리는 없을 것 같다. 문제는 ‘사랑’ 혹은 ‘관계’도 생물이어서 단계를 거치며 성장하기도 하고 사멸해버리기도 한다는 것이다.
UC 샌타바바라에는 미국 대통령직 프로젝트라는 연구 프로젝트가 있다. 그 사이트에 들어가면 프랭클린 루즈벨트 이후 모든 대통령에 대한 지지도 추이가 무지개색 도표로 만들어져 있다. 짙은 빨강(25% 이하 지지)에서 노랑을 거쳐 짙은 파랑(84% 이상)으로 갈수록 지지도가 높은 것인데 대부분 대통령이 처음에는 파랑 계열로 시작을 한다. 하지만 임기가 끝날 때면 파랑 혹은 빨강 계열의 두 부류로 나뉜다.
루즈벨트가 파랑·초록으로 일관한 인기 대통령이었다면 조지 W.부시는 9.11 직후 짙은 파랑까지 올라가지만 2005년 중반 이후는 파랑색 구경을 못하다가 빨강으로 퇴임했다. ‘사랑’이 성공하기도 하고 실패하기도 하는 것이다.
사랑의 단계는 보통 세 단계로 나뉜다. 사랑이 깨지기 시작하는 것은 두 번째 단계이다. 구름 위를 걷다가 땅에 발을 딛는 순간 모든 것이 달라지는 것이다. 현실이 명료하게 눈에 들어오고 서로의 다른 점들이 부각된다. 자연 갈등이 심하고 싸움이 잦은 기간이다.
이 단계를 무사히 넘기면 각자 다른 점을 인정하고 타협이 가능해지며 서로에 대한 기대가 현실적이 되면서 안정적 관계로 정착하는 것이다.
국민들이 열렬하게 ‘사랑에 빠진 것’은 오바마 대통령의 리더십에 일단 큰 힘이 될 것이다. 트루먼은 국민들이 꺼리는 것을 스스로 하도록 설득하고 좋아하게 만드는 능력이 대통령의 리더십이라고 했다. ‘희망’과 ‘약속’을 내걸어도 시원찮을 상황에 오바마는 국민의 ‘희생’과 ‘책임’을 요구했고, 국민들은 기꺼이 동참할 태세이다. ‘행복한’ 단합의 힘이다.
하지만 지금의 ‘열렬한 사랑’이 올 연말쯤 어떻게 바뀌어 있을 지는 아무도 알 수가 없다. 오바마 행정부 앞에 놓인 장벽들이 너무 높기 때문이다. 국민들의 현실적 기대와 오바마의 통치력이 맞아 떨어져서 모처럼 형성된 국민적 단합이 오래도록 이어지기를 바란다.
권정희 논설위원
junghkwon@koreatime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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