플레이오프의 묘미는 바로 이런데 있다. 정규시즌 성적이야 어떻든 일단 플레어오프에 오르면 모든 게 단판 승부로 갈린다. 자칫 실수를 하거나 제 컨디션을 발휘 못해 지게 되면 곧 바로 시즌을 접고 짐을 싸야 한다. 시리즈는 그나마 약간은 실수를 위한 여지가 있지만 단판 경기는 그런 여지를 허용치 않는다. NFL 플레이오프가 땀을 쥐게 하는 것은 이 때문이다.
올해 플레이오프에서 하위 팀들이 일을 내고 있다. 지난 주말 플레이오프 4경기 중 3경기서 하위시드 팀들이 상위 팀들을 침몰시키며 컨퍼런스 챔피언십 결정전에 진출했다. 특히 컨퍼런스 1번 시드를 받았던 테네시 타이탄스와 지난해 수퍼보울 우승팀 뉴욕 자이언츠가 나란히 홈구장에서 넉 아웃됐다. 챔피언 후보로 꼽히던 두 팀은 컨퍼런스 6번 시드에 불과한 볼티모어 레이븐스와 필라델피아 이글스에 일격을 맞고 침몰했다. 1번 시드 두 팀이 한꺼번에 나가떨어지기는 이번이 처음이다. ‘1번 시드의 저주’라 부를 만하다.
금세기 들어 전체 1번 시드 팀이 수퍼보울 정상까지 순항했던 것은 지난 2003년 뉴잉글랜드 패이트리어츠가 유일하다. 그 외에는 정규시즌 최고 성적 팀이 챔피언에 등극한 적이 없었다. 이 정도면 하위 팀들의 반란을 단순한 ‘운’이나 ‘이변’으로만 치부하기는 힘들다.
그렇다면 턱걸이로 플레이오프에 진출한 팀들의 선전을 어떻게 설명할 수 있을까. 이런 팀들은 대부분 정규시즌 도중 몇 차례 위기를 겪는다. 선수들이 말썽을 피우기도 하고 팀이 연패에 빠지면서 분위기가 험악해 지기도 한다.
수퍼보울 챔피언 자이언츠를 격파한 이글스는 고작 9승으로 플레이오프 자격을 얻었다. 다른 팀들이 도와주는 바람에 겨우 플레이오프에 나설 수 있었다. 시즌 종반 한때 주전 쿼터백이 바뀌는 등 어수선했다. 적지에서 우승후보 캐롤라이나 팬서스를 꺾은 애리조나 카디널스 역시 9승의 보잘 것 없는 정규시즌 성적표로 플레이오프에 나서 돌풍의 주인공이 되고 있다. 이 팀 역시 잘 나가다 연패에 빠지는 고비를 겪었다.
우여곡절 끝에 플레이오프에 나선 팀들은 우선 거칠 것, 잃을 것이 별로 없다. 이기지 않으면 안 된다는 강박관념이 상위 시드 팀들보다 덜하다. 홀가분하게 나선 경기여서인지 선수들의 몸놀림이 가벼워 보인다.
또 위기를 수습하는 과정에서 팀의 체질이 한층 강해진다. 선수들 간에 끈끈함이 더해지고 이것은 경기력의 상승으로 나타난다. 경기 중 어려운 고비가 발생했을 때 선수들 표정에서는 초초함이 별로 눈에 띄지 않는다. 여기까지 오는 과정에서 팀의 ‘역경지수’(AQ, Adversity Quotient)가 높아진 것이다.
‘역경지수’라는 말을 처음으로 사용한 사람은 폴 스톨츠라는 학자인데 그는 역경을 대하는 태도에 따라 성공이 좌우된다고 말한다. IQ(지능지수)나 EQ(감성지수)보다 AQ가 더 중요하다는 것이다. 팀이 플레이오프에 진출했다는 것은 기본적인 실력, 즉 IQ는 갖췄다는 말이다. 이 단계부터는 정신적인 요소가 크게 작용한다.
누구나 역경은 피하고 평탄하길 바라지만 그럴 수만 없는 것이 현실이다. AQ가 높은 사람은 위기 상황 속에서도 별로 흔들림이 없다. 이런저런 어려움을 극복하는 과정에서 체질이 강해졌기 때문이다. 역경과 위기가 면역주사 역할을 한 것이다.
고비를 겪지 않고 마냥 잘 나가가기만 하던 팀은 결정적인 순간에 손쉽게 무너지곤 한다. 지난해 패이트리어츠는 정규시즌 16연승의 위업에도 불구하고 수퍼보울을 품에 안지 못했다. 만약 이 팀이 정규시즌에서 한 두번 패배를 당했더라면 정상까지 가지 않았을까 싶다.
지난 시즌 NBA 챔피언 보스턴 셀틱스는 올 시즌 초반 27승2패로 파죽지세였다. 그러더니 크리스마스 이후 극도의 부진에 빠져 허우적대고 있다. 팬들에게는 실망스럽겠지만 이런 슬럼프는 보약이 된다. 챔피언으로 가는 길에 한 번은 꼭 넘어야 하는 장애물이다.
최근 경제위기가 계속되면서 거부들의 자살이 잇따르고 있다. 엄청난 부를 날렸지만 그래도 이들은 여전히 부자였다. 그런데도 자살이라는 극단적 선택들을 하고 있다. 한마디로 순탄한 성공에만 익숙해지다 보니 시련을 받아들이는 훈련이 전혀 돼 있지 않았던 탓이다. 허우대만 멀쩡했지 역경 바이러스에 대한 면역력이 형편없었던 것이다.
역경 바이러스는 우리를 쓰러뜨릴 수도, 아니면 강한 체질을 만들어 주는 면역주사 역할을 할 수도 있다. AQ가 높은 사람은 역경을 오히려 성장의 계기로 삼는다. 민족도 마찬가지다. AQ가 높은 대표적 민족은 유대인이다. “하루는 새벽이 아니라 어둠으로부터 시작된다”는 이들의 말속에서 역경을 긍정적으로 받아들이는 태도가 드러난다. 한국인들도 이에 못지않다. 어려움이 닥쳤을 때 이것을 어떤 의미로 받아들이고 어떻게 극복해 내느냐는 각자의 선택이다.
조윤성 논설위원
yoonscho@koreatime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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