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운동선수나 음악가나 마찬가지다. 타고 난 것이 90% 이상, 나머지가 10%다. 하지만 그 10%를 하지 않으면 나머지 90%가 모두 묻힐 수 있다”
지난해 늦가을 MBC 드라마 ‘베토벤 바이러스’에서 지휘자 ‘강마에’로 인기를 끌었던 김명민이 한 인터뷰에서 한 말이다. 실력에 관한한 자신만만하고 성격 까다로운, 그래서 오만하기 짝이 없는 극중 인물에 대한 분석인 데, 배우로서 그 자신에게 적용해도 무리가 없을 것이다.
예술가로 성공하려면 타고난 재능은 필수. 보통 사람들과는 확연하게 구분되는 재능이 있어야 한다. 하지만 그 길로 들어선 사람들은 모두 재능이 있으니 차이를 만들어 내는 것은 나머지 10% 즉 노력이라는 말이다.
노력은 심혈을 기울이는 자기훈련, 가능한 모든 시간을 쏟아 붓는 작업이다. 깨어있는 시간은 물론 잠들어 꿈속에서까지도 구상하고 연습하고 고민하는 피나는 노력이 재능 있는 한 인간을 음악가로, 배우로, 운동선수로 길러낸다. 결국은 시간의 산물이다.
한달 쯤 전 한 보험설계사의 은퇴소식을 다룬 기사가 있었다. 김금희 씨라는 한국의 81세 할머니인데 26년여의 설계사 생활동안 3,000여명을 고객으로 만들었고, 그의 권유로 설계사가 된 사람만도 64명이나 된다고 한다.
50대 중반 남편과 사별한 그는 삼남매와 먹고 살기 위해 일을 시작해 문전박대 등 서러움을 숱하게 겪었다. 그 어려움을 딛고 성공한 비결을 그는 “고객은 ‘화초’라는 생각으로 계속 정성을 들인 결과 많은 분들과 오랜 기간 좋은 인연을 맺은” 덕분이라고 했다.
남들이 한번 찾아갈 고객을 두번 찾아가고, 고객에게 필요한 게 있다 싶으면 발 벗고 나서서 도움을 주는, 화초 기르듯 세심하고 지극한 정성이 그를 성공한 설계사로 만들었다는 것이다.
정성이란 마음을 담아 시간을 쏟는 행위, 시간이 곧 정성이다.
인생에서 거두는 모든 성취는 기본적으로 시간의 산물이라는 사실이 나이가 드니 눈에 보인다. 시간을 우리는 보통 그 ‘흐름’으로서 인식한다.
시간은 끊임없이 흘러가는 것, 그래서 지금 이 순간은 영원히 다시없는 유일한 순간이라는 것, 살같이 빠르게 흐르니 촌음을 아껴야 한다는 것 등이다.
그런데 그렇게 흔적 없이 지나가 버리는 시간, 그리고 그날이 그날 같아서 특별히 기억할 것도 없어 보이는 시간이, 하루 이틀이 아니라 10년, 20년이 지나면 부정할 수 없는 명백한 결과들을 만들어 낸다.
영국의 한 TV가 재미있는 프로그램을 방영한 적이 있다. 사람의 일생을 수치로 환산해본 ‘인간의 발자취’라는 프로그램이었다. 담당 프로듀서가 영국인을 기준으로 정리해낸 통계치를 보면 사람은 평생 1억2320만5750개 단어를 말하고, 7163회 목욕을 하며, 533권의 책을 읽고, 1700명의 친구를 사귀며, 70리터의 눈물을 흘린다는 등이다.
그리고 평균수명을 78.5세로 잡아 사람이 태어나서 지구상에 머무는 기간을 24억7557만6000초로 환산했다. 흔적 없이 흘러간다고 하기에는 너무나도 방대한 양이다. 흔적 없이 흘러갈 수가 없는 양이다.
중년이 되어서 주변을 둘러보면 사는 모습들이 제각각이다. 대학 졸업했을 때 비슷비슷하던 동창들, 입사했을 때 고만고만하던 동기들이 이제는 처지가 천양지차다. 있는 듯 없는 듯 흘러가는 시간에 무엇을 어떻게 담아냈느냐가 만들어낸 차이이다.
시간은 거짓말을 하지 않는다. 잠깐은 몰라도 장기적으로 시간 투자 없이 거두는 성공은 없다. 헤밍웨이는 휴양지에서 노는 듯 산 것으로 유명하지만 글 쓰는 시간만은 철저했다. 매일 자신이 쓴 글자 수를 기록했을 정도라고 한다. 허풍쟁이 발자크 역시 글 쓸 때는 경건했다. 책상 앞에 앉아서 하루 16시간씩 꼬박 집필을 했다. 그 시간들이 ‘대 문호’를 만들어냈다.
인생은 자신이 선택해서 시간을 투자한 어떤 활동이나 관계의 결산이라고 할 수 있다. 일에 시간을 쏟은 사람은 일에서 결실을 얻고, 사람에게 시간을 쏟은 사람의 마음을 얻는다. 인생에서 무엇을 얻고 싶은가. 방향이 정해지면 거기에 나침반을 맞추자. 심은 대로 거두는 것이 시간의 밭이다.
권정희 논설위원
junghkwon@koreatime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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